해지는 시간: 오후 7시 33분
제6과
프랑스에서의 종교 개혁(2)
[연구범위]
각 시대의 대쟁투, 224~236
기억절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서론 : “로마교는 종교 개혁의 빛을 꺼버리고, 인류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암흑시대의 무지와 미신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방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께서 루터를 이어서 일으켜 주신 고귀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개신교는 전복되지 아니하였다. 개신교의 힘은 왕족들의 호의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장 작고 비천하고 무력한 나라들이 그 요새(要塞)가 되었다. 종교 개혁의 승리를 얻은 나라들은 멸망을 도모하고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 둘려 있는 작은 도시 제네바, 당시에 가장 크고 부요하였던 스페인의 학정에 항거하고 있던 네덜란드, 황량하고 메마른 스위스 등이었다.”(쟁투, 235, 236)
공포 시대의 엄습
1. 분별없이 열성만으로 프랑스를 각성케 하고자 취한 어떤 시도가 프랑스 전역의 개혁자들에게 중대한 위기를 초래하게 했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개혁 운동에 우호적이던 왕은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가?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독일이나 스위스와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것을 보고자 열망한 나머지 온 국민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로마교의 미신을 공격하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미사를 공격하는 격문을 하룻밤 사이에 전국에 붙였다. 그러나 분별없이 열성만으로 행한 그 일은 개혁 사업을 전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선동자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의 개혁 신앙의 동지들에게까지 파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 일은 로마교도들이 오랫동안 소원하던 것, 곧 이단자들을 국가의 안녕(安寧)과 왕위의 확립을 위태롭게 하는 선동자들로 몰아 그들의 완전한 박멸을 요구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혹 분별력 없는 동지가 한 일인지, 교활한 원수가 한 일인지 전혀 분명치 않았으나, 한 장의 격문이 왕의 거실(居室)의 출입문에 붙어 있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한 장의 종이 가운데는 다년간 존경을 받아 오던 미신을 무참하게 공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처럼 기탄없는 놀라운 문구가 왕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의 격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너무도 놀란 왕은 얼마 동안 말없이 떨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 무서운 말을 터뜨렸다. ‘루터당이라고 의심되는 자는 차별없이 체포하라. 나는 그들을 모두 박멸할 것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왕은 로마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쟁투, 224, 225)
2.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율케 할 공포 시대가 프랑스의 개혁파에게 엄습하였으나, 그럼에도 복음은 마침내 승리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가톨릭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프로테스탄트에게 가해진 만행은 언제 그 보응의 무게를 더하여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재현될 것인가?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시 28:4)
“그 희생자들은 잔인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화형을 집행할 때 그들의 고통을 더욱 연장시키기 위하여 그 화력을 약하게 하라는 특별한 지시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승리자들처럼 죽었다. 그들의 지조는 변함이 없었고, 그들의 평화에는 그늘이 없었다. 박해자들은 그들의 확고부동한 태도에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들이 패배한 것을 느끼었다. …
신부들은 대중의 분노를 절정에 이르게 하고자 노력하였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극도의 무서운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은 가톨릭 교도를 학살하려고 음모하고, 정부를 정복시키고자 하고, 왕의 암살을 도모하였다는 등의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들은 전혀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처럼 무서운 무고는 하나의 예언으로 성취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전혀 다른 입장과 환경에 있는 자로 말미암아 전연 다른 원인에서 감행될 것이었다. 가톨릭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프로테스탄트에게 가해진 만행은 그 보응의 무게를 더하였다. 그리고 후세에 이르러 이 때에 그들이 왕에게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 신하들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 일은 무신론자들로 말미암아, 그리고 법왕교도 자신들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3백 년 후에 프랑스에 그처럼 비참한 재난이 초래된 것은 개혁주의의 수립 때문에 된 것이 아니고 가톨릭측이 개혁주의를 핍박하였기 때문이었다.”(쟁투, 226, 227)
프란시스 1세의 신교 박멸책
3. 프란시스[프랑수아] 1세(1494~1547)는 16세기 초엽에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의 지도자로서 학문을 사랑하고 승려들의 무지와 미신을 경멸히 여기므로, 종교 개혁파에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으나, 결국에는 어떤 정책을 펴게 되었는가? 이것은 어떤 분명한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인가?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 3)
“프란시스 1세는 16세기 초엽에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영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자들을 각 나라에서 자기의 궁전으로 모으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종교 개혁파에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그가 학문을 사랑하고, 승려들의 무지와 미신을 경멸히 여긴 것이 그 동기의 일부가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학문을 숭상하던 그 사람도 일단 이단 박멸의 열정에 사로잡히자 드디어 프랑스 전국에 출판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프란시스 1세는 지적 교양이 종교적 편견과 핍박을 방어해 주는 보호의 수단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많은 실례 중의 하나를 보여 준다.”(쟁투, 227)
4. 신부들은 이런 왕에게 무엇을 요구했으며, 그 요구가 받아들여짐으로 프랑스는 이제 어떤 형편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2)
“프랑스는 엄숙하고 공공연한 의식을 통하여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박멸하기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신부들은 개혁파들이 미사를 정죄함으로 높으신 하나님을 모욕한 것을 피로써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서는 왕이 국민을 대신하여 이러한 전율할 행위를 공중 앞에서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드디어 1535년 1월 21일에 그 무서운 의식이 집행되도록 정해졌다. …
진리의 빛을 거부한 그 나라의 암흑은 두려운 형편에까지 이르렀다.”(쟁투, 227, 228)
피비린내 나는 공포 시대의 재현
5.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이미 나타났었지만, 프랑스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이 나라는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를 답습하고 있었는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이미 나타났었지만 프랑스는 그 은혜의 권능과 거룩함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온 미덕에 이끌리고 각 도시와 촌락이 그 빛으로 교화된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거절하고 빛보다 어두움을 택하였다. 하늘에서 온 선물이 제공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여 마침내 스스로 자아기만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은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백성을 박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실정이 그들을 무죄하다고 해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기만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고, 그들의 영혼을 피 흘린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빛을 고의로 거절하였다.
이단을 박멸하겠다는 엄숙한 맹세가 큰 전당에서 이루어졌는데, 바로 그 장소에서 약 삼백년 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에 의하여 ‘이성(理性)의 여신’이 경배를 받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행렬이 정돈되었으므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러 사람들은 그들이 맹세한 그 일에 착수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몇 사람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산 채로 화형시킬 화형주들이 세워져 있었다. 왕이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행렬이 정지되어 그 처형의 모습을 쳐다보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때에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
여러 번 행렬은 처형당하는 장소들에서 멈추었다.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왕궁에 도착하자 군중은 해산되고, 왕과 주교들은 그날의 행사에 매우 만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피차에 축하를 나누며 지금 시작한 이단 박멸 작업을 끝까지 계속하기로 하였다.”(쟁투, 229, 230)
6. 프랑스는 이 선택으로 인하여 어떤 결과를 보게 될 것이었는가? 이와 유사한 경험을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호 13:9)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 27:25)
“프랑스에서 거절한 평화의 복음은 분명히 뿌리까지 뽑혔지마는 그 결과는 또한 무서운 것이 될 것이었다. 프랑스가 개혁자들을 완전히 박해하기로 한 바로 그날부터 258년이 지난 1793년 1월 21일에는 전연 다른 목적으로 또 하나의 다른 행렬이 파리시를 통과하였다. ‘다시 왕이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였고, 다시 소동과 부르짖음이 일어났고, 다시 더욱 많은 희생자들을 요구하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검은 단두대가 서게 되었다. 다시금 그날의 활극은 무서운 사형 집행으로 끝을 맺었다. 루이 16세는 간수와 사형 집행자들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단두대 앞으로 끌려가서 도끼가 내려오기까지 붙들려 있었다. 마침내 잘려진 그의 머리는 단두대 위에서 굴렀다.’ 피의 희생 제물이 된 것은 왕만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공포 시대 동안에 바로 그 근방에서 단두대에 의하여 처형된 사람은 2천 8백명이나 되었다. …
프랑스는 하늘로부터 온 선물을 거절함으로 무정부 상태와 멸망의 씨를 뿌렸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혁명과 공포 시대를 거두었다.”(쟁투, 230)
“유대인들은 그들이 찰 착고를 스스로 만들었고, 그들이 마실 복수의 잔을 스스로 채웠다. 그들이 국가적으로 당한 완전한 멸망이나, 그들의 방황하는 처지에서 받은 저주는 그들 자신의 손으로 뿌린 것을 거두는 데 불과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호 13:9, 14:1)고 말하였다. 그들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징벌로 흔히들 이야기한다. 대기만자는 이와 같이 하여 자기가 행한 일을 숨기려고 애쓴다. 하나님의 자비를 완강하게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떠나가게 하였으며 사단은 그들을 마음대로 주관하도록 허락받았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나타난 무섭고 잔혹한 모든 사건들은 자신을 사단의 지배에 맡기는 자들에게 사단이 얼마나 무서운 마력(魔力)을 휘두르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실례이다.”(쟁투, 35, 36)
음험한 “제수이트”의 활동
7. 프랑스에서 박해의 불이 일어나자, 칼빈은 어떤 곳에서 개혁 사업에 봉사할 수 있었는가?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마 10:23)
“제네바가 이미 개혁 사업을 선언한 후에야 칼빈은 각처로 유랑하여 여러 가지 경험을 겪고 그 성읍에 들어왔다. 그는 자기가 출생한 고향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바젤(Basel)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런데 고향으로 가는 직로가 카알 5세의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불가불 제네바를 거쳐서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문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파렐은 인정하였다. 비록 제네바가 개혁주의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마는 그곳에는 아직도 성취되어야 할 큰 사업이 남아 있었다. …
파렐은 칼빈이 그 사업을 위하여 자기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청년 전도자에게 그곳에 머물러 일하라고 정중히 간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사양하였다. 겁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는 용감하고 독립심이 강하고 과격한 성질을 가진 제네바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였다. … 그러나 파렐의 엄숙한 권고는 하늘에서 온 소명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는 감히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자기를 붙들고 자기가 피하여 가려는 그 장소에 억지로 주저앉게 한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였다.”(쟁투, 233, 234)
8. 그러나 제네바에서의 개혁 사업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로마교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에서 개혁 사업을 진멸하기 위하여 어떤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였는가? “제수이트”는 어떤 조직이며, 유럽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 9)
“이 때에 개혁 사업은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법왕은 제네바에 대하여 파문의 선고를 내렸고, 강국들은 제네바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
모든 그리스도교국에서 개신교는 흉악한 원수들에게 위협을 당하였다. 개혁 사업의 최초의 승리는 지나갔다. 로마교는 개혁 사업을 진멸시키기 위하여 새 세력들을 구축하였다. 이 때에 법왕교의 투사들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무법하고, 강력한 제수이트당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혈연적 관계와 인간적 사리도 무시하고, 인정의 요구와 이성(理性)과 양심에도 무감각하여 그것들을 완전히 배척해 버리고, 규율과 유대 관계도 무시하고, 오직 저들의 규칙에 의지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진력하였다(부록 17 참조). …
그들의 단체에 속한 당원의 입장에 설 때에, 그들은 거룩한 의복을 입었고, 그들은 감옥과 병원을 방문하면서 병자와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세상을 버렸노라고 공언하였고 두루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외모로는 아무런 흠도 없이 보이는 그들이 때때로 가장 죄악적이요, 치명적인 목적을 감추고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 그 단체의 근본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의하여 거짓말, 도적질, 거짓 증거, 암살 같은 것도 그것이 교회를 이롭게 하는 일일 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되었다. 제수이트 당원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장하여 나라의 공직자들이 되고 왕의 고문관들의 지위에도 올라가서 나라의 정책을 세우는 일들을 하였다. 그들은 정탐꾼 노릇을 하기 위하여 남의 종도 되었다. 그들은 왕족들과 귀족들을 위한 대학들과 평민들을 위한 학교들을 세워서 개신교도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법왕교의 의례(儀禮)를 지키도록 하였다. … 제수이트당은 급격히 온 유럽에 퍼졌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법왕교의 부흥이 뒤따랐다.”(쟁투, 234)
개혁 운동 사상에 있어서의 칼빈의 위치
9. 로마교는 종교 개혁의 빛을 꺼버리려고 애썼지만, 개신교가 전복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개신교는 주로 어떤 도시와 나라들에서 승리를 거두었는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로마교는 종교 개혁의 빛을 꺼버리고, 인류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암흑 시대의 무지와 미신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방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께서 루터를 이어서 일으켜 주신 고귀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개신교는 전복되지 아니하였다. 개신교의 힘은 왕족들의 호의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장 작고 비천하고 무력한 나라들이 그 요새(要塞)가 되었다. 종교 개혁의 승리를 얻은 나라들은 멸망을 도모하고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 둘려 있는 작은 도시 제네바, 당시에 가장 크고 부요하였던 스페인의 학정에 항거하고 있던 네덜란드, 황량하고 메마른 스위스 등이었다.”(쟁투, 235, 236)
10. 칼빈은 약 30년간 제네바에서 어떤 목적으로 활동했으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어떤 도구가 되었는가?
“주께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심은 진리로 인하여 그것을 펼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셀라.”(시 60:4, 킹제임스)
“칼빈은 약 30년간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다. 거기서 처음에는 성경상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그 다음에는 온 유럽에 종교 개혁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공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행위와 그의 가르침에는 그릇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세계에 필요한 진리를 공포하고, 법왕교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서 개신교의 원칙을 지탱하고, 로마교의 교리에서 자라난 교만과 부패 대신에 단순하고 순결한 생명을 개혁 교회에 부식시켜 주는 도구가 되었다.”(쟁투, 236)
[상고할 말씀]
“제네바에서부터 출판물들과 교사들이 개신교의 교리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나갔다. 거기에서 각국의 핍박자들은 교훈과 권면과 격려를 기대하였다. 칼빈의 시(市) 제네바는 쫓겨 다니던 서유럽의 개혁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된 무서운 폭풍을 피하여 망명자들은 제네바를 찾아왔다. 굶주리고, 상처받고, 집과 친족을 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영접을 받고 친절한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안식처를 발견한 그들은 그들의 기능과 학식과 신앙을 활용함으로 그 도시를 복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교의 학정을 저항하기 위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자 존 녹스, 영국의 많은 청교도들,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은 모두 암흑한 본국들을 밝히기 위하여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을 들고 나갔다.”(쟁투,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