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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7시 40분


제5과


프랑스에서의 종교 개혁(1)


[연구범위]

각 시대의 대쟁투, 212~224 


기억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서론 :  마치 갈증으로 죽어가는 나그네가 생명의 샘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혼들은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함으로 날마다 즐거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이면 술집에 가는 대신에 이웃끼리 한 집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고 찬미를 불렀다. 곧 그들의 지역 사회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비천한 계급에 속하는 무식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농부들이었지만 그들의 생활에는 개혁과 향상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능력이 나타났다. 그들은 겸손, 성결, 사랑의 증거자로서 복음을 충심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어떠한 일을 이루어 주는지를 입증해 주었다.”(쟁투, 215)


프랑스에서의 개혁 운동의 선구자

1. 루터가 개혁자로서 일반에게 알려지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귀중한 진리를 발견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루터가 개혁자로서 일반에게 알려지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이미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빛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은 파리 대학의 박식한 교수 러페브르(Lefevre)였는데, 그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열성이 있고 진실한 법왕교도였다. 그는 고대 문학을 연구하는 중에 성경에 마음이 끌렸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였다.

러페브르는 열심 있는 성도 숭배자였으며, 그는 성도와 순교자들의 역사를 편집해서 교회의 성도전(聖徒傳)을 만들고자 계획하였다. 그 일은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상당히 진척되었을 때에, 성경에서 유력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서 그는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에서 많은 성도들을 찾아볼 수 있었으나 물론 로마교의 성도의 목록에 기록된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늘의 빛은 홍수처럼 그의 마음에 넘쳐흘렀다. 그는 놀람과 혐오감에 사로잡혀서 종래에 하던 일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는 거기서 찾은 귀중한 진리를 즉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쟁투, 212)

2. 러페브르(1450?~1537)는 아직 루터나 츠빙글리가 개혁 사업에 손을 대기 전에 구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무엇을 강조했는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5, 25)


1512년, 아직도 루터나 츠빙글리가 개혁 사업에 손을 대기 전에 러페브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는 의, 곧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의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또 구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아아, 이 얼마나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교환이냐? 무죄한 분이 죄인으로 선고를 받고, 죄인이 자유의 몸을 얻게 된다. 축복받은 분이 저주를 받고, 저주를 받은 자가 축복을 받는다. 생명의 임금이 죽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영광의 주께서 암흑 속에 잠기시고 허물과 치욕밖에 알지 못하는 자가 그 얼굴에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

구원의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한편 그는 또한 순종의 의무가 사람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쟁투, 212, 213)

프랑스어 신약 성경의 출판

3. 러페브르의 제자들 중에 누가 개혁주의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그는 어떤 신앙 교육을 받았는가? 러페브르와는 달리 그는 어떤 계층까지도 진리를 전파했는가?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 6)


러페브르의 문하생들 가운데는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약간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러페브르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진리를 계속해서 전할 것이었다. 윌리암 파렐(William Farel)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부모의 아들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를 가리켜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행 26:5)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열렬한 로마교도로서 교리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멸절시켜 버려야 한다는 열성으로 불타 있었다. 그는 후년에 당시의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법왕을 반대하는 말을 들을 때에 나는 마치 사나운 이리처럼 이를 갈았다’고 말하였다. … 그때 개혁자의 다음과 같은 말들은 그에게 하늘에서 오는 음성처럼 들렸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 ‘무죄한 분은 정죄를 받고, 죄인은 놓임을 받는다.’ ‘하늘의 문을 열어 주고, 음부의 문을 닫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파렐은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였다. 바울의 회개처럼 회개함으로, 그는 유전의 멍에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에 들어갔다. 그는 ‘법왕에게서 온전히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침으로 부르짖는 이리와 같이 살기 등등한 마음은 사라지고 흠 없고 유순한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러페브르는 그의 제자들에게만 빛을 전하였지마는 파렐은 법왕의 사업에 열렬했던 것과 똑같은 열성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업에 열성을 다하였고, 그는 나아가 진리를 공중에게 전파하였다. 얼마 후에 교회의 한 고위 성직자인 모오(Meaux)의 감독이 그들과 연합하였다. 재간과 학식으로 높임을 받고 있는 교수들도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궁전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동자와 농부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각 계급의 사람들이 복음의 옹호자가 되었다. 당시에 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프란시스 1세의 누이까지도 개혁 신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왕 자신도 모후(母后)와 함께 한 때는 거기에 호의를 보였으므로 개혁자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프랑스가 복음화(福音化)될 때를 기대하였다.”(쟁투, 213, 214)

4. 러페브르의 프랑스어 성경의 보급으로 지역 사회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났는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러페브르는 신약 성경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비텐부르크에서 발견되던 바로 그 때에 프랑스어 신약 성경도 모오에서 출판되었다. 그 감독은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자기의 교구(敎區) 안에 그 성경을 보급시켰으므로 드디어 모오의 농부들까지도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갈증으로 죽어가는 나그네가 생명의 샘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혼들은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함으로 날마다 즐거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이면 술집에 가는 대신에 이웃끼리 한 집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고 찬미를 불렀다. 곧 그들의 지역 사회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비천한 계급에 속하는 무식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농부들이었지만 그들의 생활에는 개혁과 향상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능력이 나타났다. 그들은 겸손, 성결, 사랑의 증거자로서 복음을 충심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어떠한 일을 이루어 주는지를 입증해 주었다.”(쟁투, 214, 215)

베르캥의 순교

5. 프랑스의 개혁자들 중에는 비천하고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귀족 출신의 베르캥(1490~1529)과 같은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베뢰아 사람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12)


루이 드 베르캥(Louis de Berquin)은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용감하고 예의 바른 기사였고, 학구열이 투철하고, 세련된 행동과 흠이 없는 도덕적 표준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법왕 제도의 신봉자요 미사에 참석하고 설교를 열심으로 듣는 자였으며, …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루터파를 미워하는 생각이 더욱 많았다’고 한 저자는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로마교의 교리가 아니라 루터의 교리인 것을 깨닫고’ 놀랐다. 그는 그 뒤로부터 온전히 복음 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다.

‘프랑스 귀족 가운데서 최대의 학자’인 그는 그의 천품(天稟)과 웅변적 재능, 백절불굴의 용기와 열심, 임금에게 총애를 받는 사람으로서 궁전에서의 영향력 등으로 보아서 천성적으로 프랑스 개혁자로 태어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베자(Beza)는 ‘만일 프란시스 1세가 제2의 선후(選侯)였었더라면 베르캥은 분명히 제2의 루터가 되었을 것이다’고 말하였다.”(쟁투, 215, 216)

6. 투옥, 고문, 화형과 같은 일에 익숙해져 있던 승려들은 베르캥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어떤 함정을 팠으며, 얼마나 신속히 사형을 집행했는가?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마침 당시에 어느 길거리에 세운 성모 마리아의 상이 파손되었다.’ 시중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서 슬픔과 분노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왕의 마음도 심히 흔들렸다. 승려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하였다. 승려들은 ‘그것이 베르캥의 가르침의 결과이며, 그 루터당은 모든 것, 곧 종교와 법률과 왕위 자체까지 전복시키고자 하고 있다’고 부르짖었다.

베르캥은 다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왕은 파리를 떠나 부재중이었으므로 승려들은 저희들 마음대로 그를 처치하게 되었다. 개혁자 베르캥은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프란시스 왕이 그를 구원해 낼 수 없도록 하고자 그 선고는 언도를 받은 그날로 집행되었다.”(쟁투, 217)

“베르캥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는 불에 사르어졌다. 그의 죽음의 소식은 프랑스 전국의 개혁파의 동지들을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본은 허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들도 장차 받을 미래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진리의 증인들은 말하였다.”(쟁투, 218, 219)

칼빈의 심적 투쟁

7. 프랑스 개혁의 중심지였던 모오(Meaux)에서 핍박이 시작되면서 복음 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는가?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모오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개혁파의 교사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박탈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지방을 향하여 떠나갔다. … 사람들은 이미 모오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으므로 그가 두려움없이 열심으로 진리를 설명할 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박해는 ‘도리어 복음의 진보’(빌 1:12)를 가져왔다. 파리와 모오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행 8:4)였다. 그리하여 빛은 프랑스의 궁벽한 먼 지방에까지 퍼지게 되었다.”(쟁투, 219)

8.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여전히 일꾼들을 준비시키고 계셨다. 칼빈(1509~1564)은 무엇 때문에 심적 투쟁을 하게 되었는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2, 1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여전히 일꾼들을 준비시키고 계셨다. 파리의 어느 학교에 사려 깊고 침착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미 강력하고 예민한 정신력을 소유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적 열성과 신앙적 헌신뿐만 아니라 고결한 생애의 특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천재적 지능과 근면은 곧 그 대학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존 칼빈은 교회의 가장 유력하고 존경할 만한 옹호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빛이, 칼빈을 둘러싸고 있던 스콜라 철학과 미신의 장벽을 뚫고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새로운 교리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교리를 선포하는 이단자들이 화형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전혀 예기치 않게 그 이단설과 접하게 되었으므로 개혁파의 교리를 대항하기 위하여서는 로마교의 신학의 능력을 시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개혁파에 가담한 칼빈의 사촌 한 사람이 파리에 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때때로 만나서 당시 그리스도교국을 혼란케 하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였다. …

이에 대하여 칼빈은 ‘나는 그대의 새 교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오류 가운데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칼빈의 심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자기의 의지로는 도저히 그것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홀로 자기의 방에서 사촌의 말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죄의 자각이 그에게 떠나지 않았다. 그는 중보자 없이 성결하고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성도의 중보, 선행, 교회의 의식, 그 모든 것들이 죄를 속하는 데는 무력하였다. 앞길은 암담하여 오직 영원한 절망이 있을 뿐이었다. 교회의 학자들은 그의 근심을 해결해 주고자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고해 성사와 고행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들은 심령을 하나님과 화목시켜 줄 수 없었다.”(쟁투, 219, 220)

복음의 투사로 나선 칼빈

9. 칼빈은 복음의 투사로서 어떻게 활동했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 20)


칼빈은 그의 사업을 조용히 착수하였다. 그의 말은 마치 땅을 적시는 이슬과 같았다. 그는 파리를 떠나서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의 역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있던 마가레트 여왕의 보호 아래 있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 이제 거하게 되었다. 칼빈은 여전히 온유하고 자긍할 줄 모르는 청년이었다. 그의 사업은 가정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읽고,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복음의 기별을 들은 사람들은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므로 그는 오래지 않아 그곳을 떠나 멀리 있는 촌락과 도시를 찾아갔다. 그는 귀족들의 큰 집과 가난한 사람의 오막살이를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용감한 진리의 증인들을 만들어 낼 교회의 기초를 놓으면서 전진하였다.

몇 달 후에 그는 다시 파리에 왔다. 파리에는 흔히 볼 수 없는 동요가 유식한 부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고대의 언어를 연구함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주목하게 되었고, 성경의 진리로 마음이 아직 사로잡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열렬히 토론하고, 로마교의 지지자들을 대항하여 투쟁까지 전개하고 있었다. 칼빈은 비록 신학적 논쟁에서는 유능한 투사였지마는, 그 학자들과 소란스런 논쟁을 하는 것 이상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제는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대학의 강당이 신학적인 논쟁으로 시끄러울 동안, 칼빈은 집집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쟁투, 221, 222)

10. 칼빈은 화형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는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칼빈은 여전히 파리에서 연구와 명상과 기도로써 장래의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는 한편 진리를 계속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당국자들은 그를 화형에 처하고자 결심하였다. …

유력한 친구들의 보호 아래 거기서 몇 개월 동안 안전하게 체류하면서 그는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프랑스의 복음화에 있었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하는 일 없이 지낼 수 없었다. …

칼빈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한 국가로서의 프랑스가 종교 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희망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의 문호가 거의 닫히게 된 것을 알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화형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독일로 가고자 작정하였다. 그가 프랑스에서 몰래 탈출하자마자 심한 폭풍우가 그 나라의 개혁파에게 엄습하였다. 그가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죽음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쟁투, 223, 224)


[상고할 말씀]

그[칼빈]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르짖었다. ‘오, 아버지! 그분의 희생은 당신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고, 그분의 피는 나의 많은 허물을 씻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나의 저주를 대신 졌고, 그분의 죽음은 나를 속량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아무 소용없는 어리석은 것들을 많이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말씀을 횃불처럼 내 앞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마음을 감동하사,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공로 이외에는 아무것이나 다 싫어하게끔 하셨습니다.’”(쟁투,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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