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는 시간: 오후 5시 33분
제5과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함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연구범위]
사도행적, 428-438; 행 25:1-26:32
기억절 :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행 26:28-29)
서론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임박한 위기를 위하여 준비하기를 갈망하신다. 준비되었거나 아니되었거나 간에 그들은 모두 위기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의 표준에 일치하게 한 자들만이 그 시험과 시련의 때에 굳게 설 것이다. 양심의 문제를 강제하기 위하여 세상 통치자들이 종교계의 목사들과 연합할 때에 참으로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흑암이 가장 깊을 때, 경건한 품성의 빛은 가장 밝게 빛날 것이다. 모든 다른 기대가 무너질 때 누가 여호와를 영원히 의지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원수들이 사면에 있어 주의 종들을 해하고자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돌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곤비한 땅에 있는 큰 바위 그늘이 되실 것이다.”(행적, 431-432)
베스도의 재판과 계속된 불공정
1. 새 총독 베스도가 도임하자마자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들은 바울을 고소하며 어떤 요청을 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베스도는 어떻게 답했는가?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행 25:1-3)
“그러나 베스도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바울을 보내기를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베스도는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 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행 25:16)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기도 미구에’ 가이사랴로 ‘떠나갈’ 것을 말하였다.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이것은 유대인들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저희가 이전에 가이사랴에서 패배한 것을 잊지 아니하였다. 사도의 침착한 태도와 능력 있는 논증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악의에 찬 정신과 근거 없는 비난이 가장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다시 그들은 바울을 심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베스도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에게 공정한 심판을 베풀고자 하는 그의 목적을 고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베스도의 결정을 지배하셔서 사도의 생명이 연장될 수 있도록 하셨다.”(행적, 428-429)
2. 가이사랴로 돌아온 베스도는 재판을 통하여 바울에 대한 저들의 고소가 근거 없는 거짓임을 알고도 왜 석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떤 제안을 했는가?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행 25:6-7)
“그들의 목적이 좌절되자 유대의 지도자들은 곧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증언을 하고자 준비하였다.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수일을 유한 후 가이사랴에 돌아오자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였다. … 유대인들은 변호사도 없는 이런 경우를 당하여 저희 스스로 고소를 제기하였다. 심문이 계속될 때에 피고의 침착하고 허심탄회함은 그들의 진술이 허위임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베스도는 논쟁 중에 있는 문제는 전부 유대인들의 교리에 관계되는 것이요 바로 이해한다면 바울에 대한 비난에는 그를 사형에 처하거나 더 투옥할 만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만일 바울을 정죄하지 않거나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할 때 일어나게 될 분노의 폭풍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베스도는 바울을 향하여 자기의 보호 아래 예루살렘으로 가서 산헤드린의 심문을 받을 것인가를 물었다.”(행적, 429-430)
바울이 이방인 가이사에게 항소함
3. 베스도는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하고 질문했으나, 바울은 돌연 가이사에게 재판받을 항소권을 왜 제기했는가?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행 25:10-11)
“사도는 그가 그들의 범죄로 하나님의 분노를 자청한 백성에게서 공의를 바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선지자 엘리야처럼 하늘의 빛을 거절하고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서보다 이방인 중에서가 더욱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투쟁에 지친 그의 활동적인 정신은 그의 심문과 투옥에 대한 거듭되는 지체와 오랜 근심을 거의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에게 호소할 수 있는 그의 특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하였다. …
베스도는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가이사에게 호소하였다는 이 말을 듣고 그는 놀랐다. 그러나 사도의 말은 재판의 진행을 중지시켰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였다.”(행적, 430)
4. 엘리야와 바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증오심을 피하여 오히려 이방인들에게서 안전을 찾아야만 했던 역사는 앞으로도 반복될 것인데, 그리스도의 종들은 어떤 신앙으로 준비되어야 하는가?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8-9)
“이리하여 고집과 독선에서 나온 증오 때문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종은 이방인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선지자 엘리야가 구조를 받기 위하여 사르밧 과부에게로 도망한 것과 복음의 사신들이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복음을 전하려고 간 것은 동일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증오심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당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교만, 형식주의, 이기심 그리고 유대인의 마음 가운데 그처럼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와 같은 압박의 정신이 있다. 장차 그리스도의 대표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취급할 때 취했던 것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조만간 당면하게 될 큰 위기에 있어서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은 똑같은 무정함과, 똑같은 잔인한 결정과, 똑같은 완고한 증오심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 사악한 날에 양심의 명령을 따라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용기와 확고부동함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 …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이 더욱 굳고 순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이 확고하면 할수록 사단은 더욱 더 맹렬하게 그들을 대적하여 의롭다고 공언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는 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신앙을 굳게 붙잡기 위해서는 가장 확고한 신뢰심과 가장 초인적인 의지가 요구될 것이다.”(행적, 430-431)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신앙의 이유를 변명함
5. 바울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므로, 호송을 기다리는 동안 베스도는 바울에게 누구 앞에서 그의 신앙의 이유를 소개할 기회를 주었는가?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행 25:13-15)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므로 베스도는 그를 로마로 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적당한 배를 구할 때까지 다소의 시간이 흘렀고 그리고 다른 죄수들도 바울과 함께 보내야 하였으므로 그들의 소송에 대한 고려도 역시 지체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가이사랴의 중요한 사람들 앞과 또한 헤롯 왕조의 최후의 왕 아그립바 2세 앞에서 그의 신앙의 이유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바울에게 주었다.
… 그는 죄수가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으로 시작하여 바울이 최근에 그의 앞에서 심문을 받은 것을 고하고, 유대인들이 그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정들의 대략을 말하였다.”(행적, 433-434)
6. 이튿날 베스도는 모인 무리들에게 바울을 어떻게 소개했는가?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이유에 대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인 예의를 갖추어 변명하기 시작했는가?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행 25:24-25)
행 26:1-3
“아그립바 왕은 이제 바울에게 자신을 위하여 말하도록 자유를 주었다. 세상의 부와 지위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사도는 그와 청중의 눈부신 허식이나 높은 계급으로 인하여 당황하지 아니하였다. 세상의 장관(壯觀)과 권세가 한순간이라도 그의 용기를 꺾거나 그에게서 자제력을 잃게 하지 못하였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고 말하였다.”(행적, 435)
“그리스도교는 사람으로 신사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예의를 나타내셨다. 참으로 주를 따르는 자들은 그와 같은 정신을 드러낼 것이다. 여러 높은 관리들 앞에 끌려 나갔던 때의 바울을 보라. 그가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한 연설은 대적을 설득시킬 수 있었던 좋은 웅변인 동시에 참된 예의를 보여 준 한 실례이다. 복음은 세상에서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형식적인 예의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참 사랑에서 우러나는 예의를 장려한다.”(복음, 123)
나사렛 예수를 예언된 메시야로 오신 분으로 분명히 소개함
7. 바울은 자신이 회개한 경험과 함께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사건들이 예언과 관련하여 성취된 것을 어떻게 자세히 설명했는가?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행 26:6-7)
행 26:4-18
“바울은 완고한 불신으로부터 나사렛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된 그의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바울은 처음에는 그를 말할 수 없는 공포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으나 후에는 최대의 위안의 근원임이 증명된 하늘의 계시, 곧 그가 멸시하고 미워했던 분, 그때에 그가 그분의 추종자들을 멸하려고까지 했었던 그분께서 그 가운데 좌정해 계셨던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묘사하였다. 그때로부터 바울은 성실하고 열렬하게 예수를 믿는 새사람이 되었으며 이와 같이 된 것은 변화시키는 은혜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분명하고 힘있게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그 개요를 설명하였다. 그는 예언의 메시야가 이미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으로 나타나셨음을 증거하였다. 그는 어떻게 구약 성경이 메시야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선언하였으며 어떻게 예수의 생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윤곽을 그린 모든 세목들이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잃어버린 세계를 구속하시려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은 십자가를 참으시고 치욕을 가볍게 여기셨으며 마침내 죽음과 무덤을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행적, 436)
8. 바울은 믿음의 이유로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어떻게 역설했는가?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논하였다. 한때 그에게도 그렇게 보였으나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어찌 불신할 수 있을까? 바울은 다메섹 성문 곁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예루살렘 거리를 거니셨고 갈바리에서 돌아가시고 죽음의 속박을 깨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을 틀림없이 보았다. 진실로 그는 게바, 야고보, 요한, 다른 제자들처럼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분과 담화하였다. 그 음성이 부활하신 구주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그에게 명하셨으니 어찌 그가 불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와 유대 온 땅과 원방에서까지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증거하였고 각 계급의 사람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하였다.
사도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행적, 436-437)
구원을 거의 얻었으나 완전히 잃어버림
9. 바울의 웅변은 왜 방해를 받았으며, 사도는 반론을 통하여 어떻게 더 확실하게 강조했는가? 아그립바 왕은 부정할 수 없는 바울의 변증과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가?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4-27)
“온 무리는 놀라운 경험에 대한 바울의 말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사도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 중에 아무도 그의 성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행적, 437)
아그립바는 깊은 감동을 받아 한동안 그의 회중들과 그의 직위의 위엄을 잊어버렸다. 그가 들은 진리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사신으로 그의 앞에 선 비천한 죄수만을 바라보고 아그립바는 무의식 중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대답하였다.”(행적, 438)
10.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대답에 자신의 매인 두 손을 들면서 어떻게 열렬하게 호소했는가?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그 자리를 떠나갔는가?
“바울이 이르되, 각하뿐 아니라 이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이렇게 결박당한 것을 빼고는 거의 나와 같이 되고 전적으로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 26:29, 킹제임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행 26:30-32)
“왕들과 치리자들은 그의 논리에 매혹되었으며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열심을 내어 예수를 전하고 그의 경험에 대한 흥미 있는 사건들을 말할 때 저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바울이 하는 말을 듣고 놀라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이 다음에 저들이 들은 바를 다시 고려해 보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단은 이와 같이 하게 하므로 그들의 마음이 저들에게 열린 기회를 소홀히 하게 하였다. 그것은 영원한 손실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다시 굳어지게 된 것이다.”(초기, 207-208)
“베스도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의당히 사도를 속박한 쇠사슬을 차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중한 죄를 범하였다. 이 범죄자들은 그날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의 제의를 들었다. 적어도 그중, 한 사람은 은혜를 받아 죄 사함을 받도록 거의 설득되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제공된 은혜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왕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남으로 회견이 끝났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회중은 흩어지면서 저희끼리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고 말하였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의 완고한 열심과 맹목적인 편견에 동참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베스도에게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사건은 높은 법정에 맡겨졌으므로 이제는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재판권 밖에 있었다.”(행적, 438)
[상고할 말씀]
“세상에는 하늘 진주를 항상 찾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의 좋지 못한 습관을 완전히 끊어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저희 안에 사시게 하기 위하여 자신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귀한 진주를 얻지 못한다. 그들은 불순(不純)한 야망과 세상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극기와 희생의 길을 걸으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들은 거의 하늘나라에 가까이 이른 것같이 보이나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 구원을 거의 얻었으나 온전히 얻지 못했다는 말은 거의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이다.”(실물, 117-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