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는 시간: 오후 7시 51분
제10과
후스와 제롬(2)
[연구범위]
각 시대의 대쟁투, 110-119
기억절 :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서론 : “이와 같은 임기응변의 수단으로 제롬은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키고 절박해 오는 죽음을 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감방의 적막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후스의 충성과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것과 비교해서 진리를 거부한 자기의 무가치한 행동을 숙고하였다. 그는 자기가 섬기기로 서약한 거룩하신 주님,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였다. 신앙을 취소하기 전에는 온갖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확증으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었지마는 이제는 그의 마음속에 오직 후회와 의혹과 고민만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로마교와 화해하려면 아직도 여러 번 신앙의 취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아가는 길은 완전한 배도로 끝날 것이었다. 그는 잠깐 동안의 고난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의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쟁투, 111-112)
또 하나의 화형주
1. 후스의 죽음이 법왕당에게 기대한 것만큼의 효과가 없자, 그들은 제롬에게는 화형에 처하는 대신 어떻게 하기로 했으며 왜 그랬는가?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이제 또 하나의 화형주가 콘스탄스 성에 세워질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의 증인의 피가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여야 할 것이었다. …
후스의 죽음은 법왕당에게 있어서 기대한 것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후스의 통행권에 대한 침해가 심한 분노와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더 안전한 방법으로, 대회의는 제롬을 화형에 처하는 대신에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강요하여 그의 주장을 취소하게 하고자 결정하였다.”(쟁투, 110-111)
2. 후스와 다르게 제롬은 왜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그는 회의장에 끌려나와 오류를 취소하든가, 화형으로 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가 당한 무서운 고난을 생각해 보면 수감 초기에 죽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는 동정 깊은 처사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제 옥중에서 당한 고통으로 얻은 질병 때문에 기력이 쇠하여졌고, 근심과 불안에서 오는 괴로움, 친구들과의 이별, 후스의 죽음으로 인한 낙심 등과 같은 일들로 말미암아 제롬의 용기는 꺾이어 마침내 그는 회의에 굴복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고, 위클리프와 후스가 가르친 교리 중 소위 ‘신성한 진리’ 이외의 것을 정죄한 회의의 결의를 수락하였다.”(쟁투, 111)
제롬의 신앙 고백
3. 이와 같이 임기응변으로 제롬은 죽음을 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후에는 후회하고 어떻게 하기로 결심했는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이와 같은 임기응변의 수단으로 제롬은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키고 절박해 오는 죽음을 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감방의 적막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후스의 충성과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것과 비교해서 진리를 거부한 자기의 무가치한 행동을 숙고하였다. 그는 자기가 섬기기로 서약한 거룩하신 주님,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였다. 신앙을 취소하기 전에는 온갖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확증으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었지마는 이제는 그의 마음속에 오직 후회와 의혹과 고민만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로마교와 화해하려면 아직도 여러 번 신앙의 취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아가는 길은 완전한 배도로 끝날 것이었다. 그는 잠깐 동안의 고난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의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쟁투, 111-112)
“죄로 영혼을 더럽히기보다는 차라리 궁핍과 비난과 친구들과의 분리와 어떤 종류의 고난이라도 택하라. 불명예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5증언, 147)
4. 제롬은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고백하면서, 그들을 규탄했는가?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1-12)
“그[제롬]는 자기가 진리를 부인한 사실에 자책감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말하였다. ‘청년 시대 이후로 내가 범한 모든 죄악 중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내가 이 흉악한 장소에서 범한 죄이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스승이요 친구인 거룩한 순교자 얀 후스와 위클리프에 대하여 내린 간악한 선고를 시인하였다. 그러나 나는 충심으로 그 일을 참회한다. 나는 불명예스럽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두 사람의 교리를 부인한 것을 고백한다. …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용서해 주시되, 가증한 이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는 재판관들을 가리키면서 엄숙하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위클리프와 얀 후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들이 교회의 교리를 침해한 연고에서가 아니고, 그들이 성직자들의 비행과 추문, 곧 그들의 허식과 교만, 주교와 신부들의 온갖 죄악들을 적발하여 공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말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나 역시 너희들을 규탄하는 바이다.’”(쟁투, 113-114)
후스의 뒤를 따른 제롬
5. 제롬이 교회의 권력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무엇을 엿볼 수 있는가?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9)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제롬은 교회의 권력자들의 방문을 받고, 대회의의 결정에 복종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로마교에 대한 반대를 취소한다면, 그 보상으로 그의 앞에 가장 밝은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영화가 주어지자 제롬은 그의 주님처럼 그것을 확고하게 물리쳤다.
‘성경으로 나의 오류를 지적해 준다면, 나는 그것을 거리낌없이 버리겠다’고 그는 단언하였다.
‘성경이라고? 그렇다면 만사를 다 그것으로만 판단해야 된단 말이냐?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고 그를 유혹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은 부르짖었다.
이에 대하여 제롬은 대답하였다. ‘우리 구주의 복음보다도 사람의 유전이 신앙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바울은 자기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게 사람의 유전을 들으라고 권하지 않고, 도리어 “성경을 상고하라”고 말하였다.’”(쟁투, 114)
6. 결국 제롬도 후스의 뒤를 따르는 길을 택했다. 그는 화염 속에서 어떻게 기도 드렸으며,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었는가?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화염이 그를 둘러싸자 그는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주여, 전능하신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언제나 당신의 진리를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고 그는 외쳤다. 마침내 그의 소리는 그쳤으나 기도하는 그의 입술은 그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불길이 그치자 그 순교자의 재는 거기에 남아 있는 흙과 함께 후스의 재처럼 라인강에 던져졌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파한 진리의 빛, 그들의 영웅적인 모본으로 남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여명(黎明)을 막으려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양을 돌아가는 궤도에서 역전(逆轉)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것이었다.”(쟁투, 115)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십자군이 궤멸 당함
7. 후스를 죽인 자들은 그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했는가? 이 전투에서 어떤 장군들이 도움을 주었는가?
“…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삿 3:9)
“후스를 죽인 자들은 그의 운동이 승리하는 것을 조용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법왕과 황제가 연합하여 이 운동을 진압하려 하였으며, 시기스문트의 군대는 보헤미아를 향하여 몰려왔다.
그런데 이 때에 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개전 직후에 두 눈을 다 잃어버린 지스카(ziska)로서 당시에 가장 훌륭한 장군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보헤미아군의 지휘관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들의 사업의 정당성을 신뢰하면서 사람들은 침공해 오는 가장 강력한 군대와 맞서 싸웠다. 황제는 여러 번 거듭하여 새로운 군대를 보내어 보헤미아를 공격하였으나 굴욕적이게도 격퇴를 당할 뿐이었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개전 후 불과 수년 만에 그 용감한 장군 지스카는 죽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용감한, 아니 어떤 점으로는 그보다도 더욱 훌륭한 장군인 프로코피우스(Procopius)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보헤미아인의 원수들은 그 눈먼 용사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들이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줄로 믿었다. 법왕은 후스의 신봉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보낼 것을 포고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급히 많은 군대를 보헤미아로 투입시켰으나 결국은 엄청난 패배를 당할 뿐이었다. 또 다시 십자군의 파견이 선포되었다. … ‘십자군은 월등하게 우세한 군대였으며, 후스의 신봉자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참으로 먼 거리에서부터 왔기에 그 시내를 건너서 급히 돌진하거나, 그들과 접전하기보다는 조용히 서서 상대방의 전사들을 주목하여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 때에 그들은 갑자기 기이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에 의하여 쫓겨가듯이 한 번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그 대군은 깨어지고 흩어졌다. 무수한 군사들이 도망하다가 그들을 쫓아간 보헤미아군에게 살육을 당하고, 막대한 전리품이 승리자들의 손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 전쟁은 보헤미아 사람들을 곤궁에 빠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요하게 해주었다.”(쟁투, 115-116)
8. 수년 후에 다시 십자군을 징집했는데, 십자군을 모집하기 위하여 어떤 거짓말을 했는가? 월등하게 우세한 십자군이 연약한 소수의 방위군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시 53:5)
(출 14:27-28; 삿 7:22; 왕하 19:34-35; 사 37:35-36 참조)
“수년 후에 다른 법왕이 십자군을 다시 일으켰다. 전과 같이 군대와 자금이 법왕권 하에 있는 온 유럽 각국에서 징집되었다. 이 위험한 일에 가담시키고자 권유하는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리 가증한 죄를 범하여도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것이 보증되었다. 전쟁에서 죽는 자들은 하늘에서의 큰 상이 약속되었고 살아남는 자들은 그 전쟁터에서 명예와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증되었다. …
그런데 십자군들은 적군이 접근해오는 소리를 듣자 후스파의 군대를 보기도 전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왕족들과 장군들과 일반 군사들은 그들의 무기를 내어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하였다. 침략군의 총지휘자인 법왕의 사절은 공포감에 눌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자 애를 썼지마는 헛수고였다. 그는 온갖 노력을 다 하였지만 마침내 그 자신도 도망하는 무리들에게 휩쓸려가고 있었다. 침략군은 완전히 패배당하였고, 막대한 전리품이 다시 승리자의 손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유럽의 가장 강력한 나라들로부터 파견된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하여 훈련받고 무장한 무리로 이루어진 두 번째의 대군은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한 연약한 국민으로 편성된 소수의 방위군 앞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침략군은 초자연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 앞에서 미디안 군대를 도망하게 하시며, 하룻밤 사이에 교만한 앗시리아 군대를 쳐부수신 하나님께서 억압자의 세력을 꺾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다시 한번 펴셨던 것이었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시 53:5).”(쟁투, 116-117)
보헤미아인의 인내
9. 보헤미야의 후스의 신봉자들이 법왕교의 거대한 군대의 무력에는 믿음을 지키고 잘 견디었으나, 어떤 속임수에 타협하고 말았는가?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요이 1:9-11)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을 단념하고, 드디어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쓰게 되었다. 표면으로는 보헤미아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을 로마의 권력에 넘겨주는 타협책을 쓰게 되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로마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을 강론하는 자유, 모든 교인들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하여 떡과 포도즙을 나눌 수 있고 예배 시간에 각각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성직자가 모든 세속적인 직위와 권력에서 제외되는 일,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법정의 사법권이 성직자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 등이었다. 드디어 법왕측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출한 네 가지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조문의 명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해석권은 종교 회의 즉 법왕과 황제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조건 아래 조약은 맺어지고, 로마는 투쟁으로 얻지 못한 것을 허위와 사기로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하여서도 성경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이 독자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 조문들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보헤미아인들은 그 조약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화와 분열이 생기고 나중에는 투쟁과 유혈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 내란으로 인하여 고상한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죽고, 보헤미아인의 자유는 없어졌다.”(쟁투, 117-118)
10. 그러나 보헤미아에서 겉으로는 법왕교가 완전히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 중에는 끝까지 충성을 지킨 어떤 무리가 있었는가?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19, 24-25)
“소란과 쟁투와 유혈 사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외국의 군대가 다시 보헤미아에 침입하였고, 국내의 내분(內紛)은 계속적으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끝까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사람들은 지독한 박해를 당하였다.
그들의 옛날의 형제들이 로마교와 조약을 맺어 그 오류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 초기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합된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특수한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각층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확고한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산림과 동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여러 나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여기저기에 진리를 아는 자가 있는 것과 그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여러 읍과 촌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들처럼 박해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알프스 산 중에는 성경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가 있으며 그곳에서 우상 숭배로 부패된 로마를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정보는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으며, 그들은 왈덴스인들과 교통하게 되었다.”(쟁투, 118-119)
[상고할 말씀]
“보헤미아인들은 복음을 굳게 지키면서 박해의 어두운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멀리 지평선 저쪽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들은 실로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 … 그러나 그들은 후스에게서 처음으로 듣고, 제롬에게서 다시 반복하여 들은 말, 곧 새벽이 오려면 한 백 년은 지나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은 후스의 신봉자들에게 있어서 마치 애굽에 속박되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요셉의 유언, 곧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사 허락하신 땅에 돌아가게 하시리라’고 한 유언과 같았다.’ ‘15세기 말엽이 되자 “연합된 형제들”의 교회는 더디기는 하였으나 확실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고난을 면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평화를 누렸다. 16세기 초엽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그들의 교회가 약 200곳 정도 있었다.’ ‘그러므로 불과 검의 멸망과 분노에서 벗어난 남은 자로서 후스가 예언한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쟁투,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