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는 시간: 오후 7시 46분
제9과
후스와 제롬(1)
[연구범위]
각 시대의 대쟁투, 97-110
기억절 :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서론 : “그 당시의 후스의 마음에는 일종의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교회는 위협으로 그를 억누르고자 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교회의 권위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로마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배우자요, 법왕은 하나님의 대표자요 대리자였다. 후스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권위의 악용이었지 원칙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그의 양심의 주장 사이에 무서운 갈등을 일으켰다. 자기가 그렇다고 믿은 대로 로마교의 권위가 정당하고 그릇됨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거기에 불순종해야 한다고 느껴지는가? 그는 복종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위 흠이 없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것이 바로 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를 언제나 번민하게 하는 의문이었다. 그가 궁리해 낼 수 있었던 가장 가능한 해답은 일찍이 구주 당시에 그랬었던 것처럼 교회의 제사장들이 악한 사람들로 바뀌어져서 그들의 합법적인 권위를 불법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해답은 후스로 하여금, 깨달음을 통하여 전달된 성경의 교훈들이 양심을 지배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자신의 지도를 위한 지침으로 채택하고 다른 이들도 그들의 지침으로 삼도록 가르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릇됨이 없는 지도자는 신부를 통하여 말하는 교회가 아니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었다.”(쟁투, 101-102)
얀 후스
1. 후스(1369?-1415)가 태어날 당시의 종교계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후스가 태어나기 전에 보헤미아에는 이미 교회의 부패와 백성들의 비행을 공공연하게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었다. 그러므로 승려 계급은 두려움을 느끼고 복음 사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그들은 숲속과 산으로 쫓겨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군사들은 그들을 찾아내어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얼마 후에 로마교의 예배에서 벗어나는 자는 화형에 처한다는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들의 사업의 승리를 확신하고 눈을 감았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진리의 원수의 분노는 오늘날 우리들을 이기고 있지마는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평민 가운데서 한 사람이 권세와 검을 쥐지 않고 일어날 것인데, 그들은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루터의 시대는 아직 먼 미래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제 로마를 공격하는 그의 증언으로 모든 나라를 일깨우게 할 한 사람이 일어나는 중에 있었다.”(쟁투, 97-98)
2. 얀 후스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얀 후스(John Huss)는 비천한 계급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에 그의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한 어머니는 교육시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러한 유업을 그 자식에게 남겨 주고자 애를 썼다. 후스는 처음에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그 후에 프라하 대학의 자선 장학금으로 공부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프라하를 향한 여로에 올랐다. 과부로서 가난에 시달리는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줄 만한 세상 재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큰 도시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아버지 없는 자기의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 복을 빌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기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에 대하여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쟁투, 98)
로마교의 신봉자에서 진리의 옹호자로
3. 후스는 로마교의 신봉자로 성장하여 어떤 직책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6~38)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후스는 부지런한 공부와 신속한 학업의 향상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깨끗한 생애와 온유하고 쾌활한 성격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로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교회가 수여한다고 공언하는 영적 축복을 매우 갈망하였다. 그는 어떤 큰 성회에 참석하였을 때 참회하러 나아가 호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돈을 다 털어 바치고 사면(赦免)을 얻기 위하여 행렬 가운데 참례한 일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그는 신부의 직분을 얻었으며, 그 후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 전속의 승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교의 교수가 되고, 그 후에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불과 수년 만에 구호금의 장학금을 받던 비천한 일개 학생이 보헤미아의 자랑이 되고, 그 명성을 온 구라파에 떨치게 되었다.”(쟁투, 98-99)
4.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개혁 사업을 착수하게 되었는가?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그러나 그는 다른 한 분야에서 개혁 사업을 착수하였다. 성직에 나간 지 수년 후에 그는 베들레헴 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회당의 설립자는 성경을 자국어로 설교하는 일을 참으로 중요한 일로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 일은 로마에서 반대하는 일이었으나 보헤미아에 있어서는 완전히 중지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성경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무지는 실로 컸으며,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가장 악한 일들이 편만해 있었다. 후스는 이러한 죄악들을 기탄없이 견책하고, 자기가 설명한 진리의 원칙과 순결을 역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곡히 호소하였다.”(쟁투, 99)
후스의 교회관
5. 후스의 마음에 있었던 일종의 번민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그를 언제나 번민하게 하는 이 의문에 대하여 어떤 깨달음과 결론을 얻었는가?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그 당시의 후스의 마음에는 일종의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교회는 위협으로 그를 억누르고자 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교회의 권위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로마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배우자요, 법왕은 하나님의 대표자요 대리자였다. 후스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권위의 악용이었지 원칙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그의 양심의 주장 사이에 무서운 갈등을 일으켰다. 자기가 그렇다고 믿은 대로 로마교의 권위가 정당하고 그릇됨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거기에 불순종해야 한다고 느껴지는가? 그는 복종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위 흠이 없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것이 바로 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를 언제나 번민하게 하는 의문이었다. 그가 궁리해 낼 수 있었던 가장 가능한 해답은 일찍이 구주 당시에 그랬었던 것처럼 교회의 제사장들이 악한 사람들로 바뀌어져서 그들의 합법적인 권위를 불법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해답은 후스로 하여금, 깨달음을 통하여 전달된 성경의 교훈들이 양심을 지배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자신의 지도를 위한 지침으로 채택하고 다른 이들도 그들의 지침으로 삼도록 가르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릇됨이 없는 지도자는 신부를 통하여 말하는 교회가 아니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었다.”(쟁투, 101-102)
6. 이런 번민은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윌리엄 밀러의 재림 기별을 들은 재림신도들에게도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그리고 윌리엄 밀러 당시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사랑하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사람들의 빛과 생명이 그리스도의 시대의 교회 당국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하였던 것과 같이 그 후의 각 세대에 있어서도 그래 왔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에서 물러나신 것과 같은 역사가 거듭거듭 반복되었다.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기성 교회에서 분리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종교적 지도자들이 그 빛을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 빛을 전하던 자들은 진리를 사모하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개혁자들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이들 중에 개혁자들의 정신에 자극되어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듣고 어떤 모양으로 진리가 제시되던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가 드물다.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한 가르침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교회를 불가불 떠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빛을 찾는 이들이 그와 같은 교훈으로 말미암아 그들 선조의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순종을 하기 위함이었다.”(소망, 232)
“그[밀러]의 사업이 교회들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얼마 동안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재림교리를 배척하기로 결의하고 그 문제에 관하여 일체의 토의를 하지 못하도록 한 후부터 그들은 강단에서 그 문제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인들이 재림을 전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일까지도 금하고, 심지어 교회의 기도회 같은 데서 그들의 소망을 말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그들이 큰 시련과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를 사랑하였고, 거기서 떠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가 압박을 당하고, 예언을 연구하는 그들의 권리가 박탈당한 것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그 사람들의 말에 복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여야 할 것을 느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막으려는 자들을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본래 속해 있던 교회에서 떠나는 일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1844년 여름에 5만 명의 교인들이 여러 교회에서 나왔다.”(쟁투, 375-376)
후스와 제롬의 연합된 활동
7. 지금까지는 개혁 사업에서 후스 혼자 활동했으나,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와 연합함으로써 개혁 사업이 한층 더 확장되었는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지금까지 후스는 단독으로 활동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영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제롬이 개혁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두 사람은 완전히 연합된 생활을 하였으며, 사망도 그들을 헤어지게 할 수 없었다. 대중의 인기를 끄는 재간을 가진 제롬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 말을 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그러나 참된 인격을 형성하는 자질(資質)을 구비한 점에 있어서는 후스가 한층 더 탁월하였다. 그의 냉정한 판단력이 제롬의 충동적인 정신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잘하였다. 한편 제롬은 참으로 겸손하게 후스의 진가(眞價)를 인정하고 그의 권면을 잘 받아들였다. 그들의 연합적 활동으로 개혁 사업은 한층 더 신속히 확장되어 나갔다.”(쟁투, 102-103)
8. 후스와 제롬의 연합된 활동으로 시작된 개혁 사업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하나님께서 택함을 입은 그 사람들의 마음에 큰 빛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로마의 여러 가지 오류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할 빛을 남김없이 다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로마교의 흑암에서 나오도록 인도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큰 장애를 만나야 할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인도하여 내셨다. 그들은 모든 빛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오의 햇빛과 같이 눈부시게 밝은 빛이 주어졌었더라면, 암흑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사람들처럼 그들은 돌아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사람들이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빛을 나타내 주셨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충성된 일꾼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사람들을 차츰 깊은 개혁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이다.”(쟁투, 103)
후스의 최후 증언
9. 개혁을 요구하던 후스는 결국 투옥되고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도록 요구를 받았다. 그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후스는 마지막으로 큰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것은 실로 규모가 크고도 엄숙한 집회였다. 황제와 왕공과 사신과 추기경들과 감독과 신부들이 열석하고, 밖에는 허다한 방청자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긴 투쟁에서 최초의 큰 희생자를 목격하고자 그리스도교국의 각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후스는 최후의 결심을 표명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자기의 견해를 철회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
그리고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다시 받게 되자 그는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구원을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귀중하게 여긴다.’”(쟁투, 108-109)
10. 결국 후스는 화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순교 직전까지도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는 순교의 순간마저도 어떻게 원수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는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7-28)
마 5:10-12 참조
“그 후에 그는 세속적 권세에 맡겨져 처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그의 뒤에는 많은 군중, 몇백 명의 무장한 사람들,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신부와 주교들, 콘스탄스 성의 주민들이 따랐다. 그가 화형주에 결박되고 불을 붙일 수 있는 준비가 다 갖추어졌을 때에 그 순교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그의 오류를 취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 이윽고 불을 붙이매 그는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찬미를 그의 목소리가 영원히 그쳐질 때까지 불렀다.
심지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쟁투, 109)
후스가 뿌린 진리의 씨
11. 후스는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그가 뿌린 진리의 씨는 어떤 열매를 맺게 될 것인가?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후스의 몸이 다 타버린 다음에 그들은 그 재와 흙을 모아서 라인강에 던져 대해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의 핍박자들은 그가 전한 진리를 근절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날에 던져진 재가 대해로 흘러가서 각 나라에 씨를 뿌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질 것을 그들은 거의 생각지 못하였다. 콘스탄스의 회의장에서 부르짖은 그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그 후 각 시대를 통하여 쉼 없이 울려 퍼질 것이었다. 후스는 이미 가고 없으나 그가 생명을 바쳐서까지 옹호한 그 진리는 결코 멸절될 수 없었다. 그의 신앙과 충성의 모본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문과 사망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처형(處刑)은 횡포한 로마의 잔인성을 전 세계에 드러내 보이는 일이 되었다. 진리의 원수들은 자기들이 없애 버리려고 한 그 사업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히려 발전시키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쟁투, 110)
12.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심으로 인류를 구원해 주셨다.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어떤 비유를 말씀해주셨는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밀알처럼 인자는 땅속에 던진 바 되어 죽으시고 눈에 보이지 않게 장사되어야 하셨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장래를 나타내실 때에 자연의 사물을 통하여 설명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의 사명의 참된 결과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에 밀알은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매가 맺힐 것이었다. 식물계의 법칙과 같이 생명은 그분의 죽으심의 결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소망, 622-623)
[상고할 말씀]
“복음이 보헤미아에 전파되기는 이미 9세기의 일이었다. 성경이 번역되고 백성들은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법왕권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가리워졌다. 평소에 왕들의 권세를 꺾어 버릴 뿐 아니라 백성들을 노예의 상태로 만들고자 꾀해 오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예외 없이 보헤미아어로 공중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악과 이단이 생기게 되었다’고 법왕은 선언하였다. 그와 같이 로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꺼버리고 백성들을 암흑 가운데 가두어 두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기구를 통하여 교회를 보존하시고자 계획하셨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박해를 만나 쫓겨난 많은 왈덴스와 알비젠스(Albigenses)인들이 보헤미아로 피난하였다. 비록 그들은 그곳에서 공공연하게 전도하지 못하였으나 은밀한 가운데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보존되어 왔다.”(쟁투,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