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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5시 43분


제3과


“누가 가장 크냐”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432-446; 마태복음 17:22-27; 18:1-20; 마가복음 9:30-50; 누가복음 9:46-48


기억절 :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1-4)


서론 :  죄에 빠지게 하여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습관이나 행습은 무엇이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영혼에 유익이 될 수 없다. 영원한 의의 원칙을 어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따를 수 없다. 그리고 한 가지라도 마음에 품은 죄는 품성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기에 넉넉하다. 몸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발이나 손을 절단하거나 심지어 눈을 빼버리는 일이 있거든 하물며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힘써야 할 것인가!”(소망, 439)


성전에 불충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것인가

1. 베드로는 성전세 징수자들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았으며, 성급하게 어떻게 대답해 버렸는가?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마 17:24-25)


그들이 동네에 도착하자 얼마 안 되어 성전세를 받는 자가 베드로에게 와서 ‘너의 선생이 반 세겔(성전세로 바치는 금액:난외주석)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물었다. 이 세금은 국가의 세금이 아니라 종교적인 기부금으로서 모든 유대인은 성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년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세를 바치지 않겠다고 하면 성전에 대해서 불충실하다고 간주될 것이었는바 랍비들은 이것을 매우 무거운 죄로 평가하고 있었다. 랍비들이 만든 법에 대한 구주의 태도와 인습의 옹호자들에 대한 솔직한 책망은 그가 성전의 봉사를 전복시키려고 한다는 비난을 할 구실을 주었다. 이제 예수의 원수들은 그에 대해 의혹을 품게 할 기회를 포착했다. 세금 징수자가 쾌히 그 일에 협력하였다.

베드로는 세금 받는 자의 질문 가운데서 성전에 대한 그리스도의 충성에 관계되는 은근한 암시를 알아차렸다. 그는 선생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한 열성으로 주님과 상의도 하지 않고 예수께서 세를 바칠 것이라고 성급하게 대답해 버렸다.”(소망, 432-433)

2. 베드로가 성급하게 판단하고 대답함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비난할 어떤 구실로부터 피할 수 없게 되었는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 18:15)


그러나 베드로는 질문한 자의 목적을 일부밖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는 세금 내는 것을 면제받는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약간 있었다. 성소 봉사를 위하여 구별되었던 모세 당시의 레위인들은 백성들 가운데서 기업을 받지 못하였다.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당시에도 여전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을 위하여 특별히 헌신한 자로서 취급을 받았으며 그들에게는 성전의 유지를 위한 연세(年稅)가 요구되지 않았다. 선지자들도 역시 면제를 받았다. 랍비들은 예수에게 세를 요구함으로써 선지자나 선생으로서의 그의 당연한 권리를 무시하고 일개 평범한 사람을 대하듯이 그를 취급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세금을 거절하면 성전에 대하여 불충(不忠)한 것으로 해석될 것이요, 반면에 세를 바치면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여김을 받을 것이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베드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였으나 이제 그는 그의 선생의 신분을 설명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예수께서 세를 바칠 것이라고 수금하는 자에게 대답함으로써 베드로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유포시키려고 애쓰는 예수에 대한 거짓된 관념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 되었다.”(소망, 433)

두 가지의 문제를 동시에 침묵시킬 증거의 표적

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제자들)의 잘못된 판단을 어떻게 올바로 일깨워 주셨는가?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마 17:25-26)


베드로가 집에 들어갔을 때에 구주께서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아니하시고,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고 물으셨다. ‘타인에게니이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저희 왕을 위하여 납세(納稅)를 하지만 왕의 자녀들은 면세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에게 드리는 봉사를 유지하기 위한 요구를 받으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이런 의무를 행할 필요가 없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면세된다면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 되는 예수에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소망, 433-434)

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세 징수자에게 한 베드로의 대답을 외면하지 않으신 반면, 어떻게 원수들의 비난의 구실을 침묵시키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표적의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어떤 믿음을 가르치고자 하셨는가?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7)


예수께서 만일 한마디의 항의도 없이 성전세를 바치셨더라면 그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신성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셨으나 그 주장을 하게 된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하셨다. 세를 지불하실 돈을 준비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의 신적인 신분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다.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자요 그러므로 그 나라의 일개 시민처럼 세를 내실 의무가 없으시다는 것이 명백하여졌다.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지시하셨다. …

예수께서는 당신이 세를 바칠 의무가 없음을 명백히 하시는 한편 그 문제에 대해서 유대인들과 쟁론하시지 아니하였는데 그 까닭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곡해하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적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세를 내지 않으심으로써 저들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부당한 요구이지만,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 이 교훈은 제자들에게 크게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성전 봉사에 대한 저희의 관계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기성 질서에 대해서 쓸데없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가능한 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오해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한가지 원칙이라도 희생시켜서는 안 되지만 어느 때에든지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을 피해야 한다.”(소망, 434)

“구속! 오! 그 말은 얼마나 포괄적인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속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구속을 받아 향상되고 성화되어 구원의 큰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과 능히 협력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쓰시고 당신의 생애와 품성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행한다면 가장 가난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셨다. 그분께서는 세금을 낼 동전 한 닢조차 없으셨고 그 적은 돈을 얻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다.

보배로우신 구주 예수께서는 집이 없었고 종종 굶주리셨다. 그는 머리 둘 곳이 없었다. 그는 종종 피곤하셨다. 인간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인성을 쓰셨으므로 인간은 높임을 받는다. … 그의 품성이 친히 우리 속에 반영되는지를 보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허리를 굽히사 우리 품성을 살펴보신다(편지 119, 1893).”(내가 그리스도를 알려하여, 47)

서로 누가 크냐 – 루스벨의 정신과 예수님의 정신

5. 베드로가 낚시하러 나간 후 예수님께서는 남은 제자들에게 노중에서 있었던 논쟁에 대하여 어떻게 질문하셨으며, 높고자 하는 정신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자고심 때문에 일어난 분쟁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3-35)


가장 높은 자리를 탐내는 분쟁은 하늘에서 대쟁투를 발발시키고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오시게 하여 죽게 한 바로 그 정신의 역사(役事)였다. 그리스도의 눈 앞에는 보좌를 두른 모든 천사보다 탁월한 영광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아침의 아들’ 루스벨의 환상이 떠올랐다. 루스벨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2, 14)고 말하였었다. 그리하여 자고심 때문에 하늘 궁정에는 분쟁이 일어나고 많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추방되었다. 루스벨이 진실로 지극히 높은 자와 같이 되기를 바랐다면 하늘에 지정된 자기의 자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은 자의 정신은 이기심 없는 봉사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루스벨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지 그의 품성은 아니었다. 루스벨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장 높은 지위를 구하였던 바 그의 정신에 자극되어 움직이는 자마다 그와 같은 일을 행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간과 불화와 분쟁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지배권은 가장 강한 자의 전리품이 된다. 사단의 왕국은 완력의 왕국이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전진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하거나 자신이 더 높은 자리로 오를 수 있는 디딤돌로 생각한다.”(소망, 435-436)

6. 진실로 높은 자의 정신은 어떤 정신인가? 지극히 높은 자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을 지배하는 원칙과 위대함의 정신을 어떤 모본으로 보여주셨는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루스벨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것을 생각한 반면에 높임을 받은 자 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 8). 이제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바로 앞에 있었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이기심 즉 사단의 왕국의 원칙으로 가득 차서 저희 주님을 동정할 수 없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주께서 수욕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분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매우 부드러우시나 엄숙한 어조로 옳지 못한 것을 시정하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원칙이 무엇인 것과 하늘 조정의 표준에 의하여 평가를 받는 참된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이셨다. 자만과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동기로 움직여지는 자들은 자신을 생각하며, 그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하나님께 어떻게 보답할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받을 보수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그들은 사단의 반열에 동참하였으므로 하늘나라에서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었다.”(소망, 436)

천국의 속성

7.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질문했으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속성의 원칙을 설명하시기 위해 누구를 소개하셨는가?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1-4)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의 나라의 성질에 대해서 교훈을 받는 것으로 넉넉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나라의 원칙에 그들을 일치시켜 줄 마음의 변화였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불러 그를 제자들 가운데 세운 후 그 어린이를 당신의 팔로 친절하게 안으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 자기 부정, 신뢰하는 사랑은 하늘이 가치 있게 여기는 속성들이다. 이 속성들이 진정한 위대함의 특성들이다.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의 나라는 세속적인 위엄이나 외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이런 모든 구별이 예수님의 발아래서는 잊혀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무식한 자가 계급이나 명성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모든 사람이 피로 산 영혼의 자격으로 서로를 대하며, 그들을 속량해서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를 모두가 다 의뢰한다.”(소망, 436-437)

8. 구주의 말씀을 듣고, 요한은 어떤 질문을 했으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답하셨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제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8-40)


이 사람을 제지함으로써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주님의 명예를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것을 위하여 시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저희 잘못을 시인하고 … 예수의 책망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저희는 그리스도와 친숙하다는 것을 보이는 자들은 아무도 배척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품성과 사업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마음 문을 연 자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동기를 파악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이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였다. 예수께서 친히 육체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고 저희 수중에 사업이 맡겨졌을 때 그들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정신에 빠지지 말고 저희 주께서 보이신 바와 같은 원대한 동정을 나타내야 하였다.

어떤 사람이 모든 일에 우리 개인의 생각이나 의견에 일치하게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사이시니 우리는 판단하거나 억제하지 말고 각기 예수의 발아래 겸손히 앉아서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신 영혼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관용하시는 사랑을 드러낼 통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지닌 자들을 낙심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상에 비추시고자 원하셨던 빛줄기를 차단하지 말도록 얼마나 조심하여야 하겠는가!”(소망, 437-438)

한 영혼을 실족케 하는 일의 위험

9.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빛을 지닌 한 영혼을 낙심케 하거나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단호하게 말씀하셨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 9:41-42)

막 9:43-45


여기에 말한 그리스도를 믿는 소자란 단순히 나이가 어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우리들이 약한 형제를 등한히 하거나, 멸시하면 안 되기 때문이며,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있거나, 억압하거나 비판하고 정죄함으로써 그들을 낙심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리뷰 1895. 4. 16).”(화잇주석, 마 18:6)

“그리스도께서 이끌고 계셨던 한 사람에 대하여 한 제자가 보인 가혹함과 냉정함-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던 자를 요한이 금한 것과 같은 행동-은 그 발을 돌이키게 하여 원수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영혼을 잃어버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왜 그 이상 더 강렬할 수 없는 이토록 중대한 말씀을 하셨을까? 그 까닭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저희의 동료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하늘의 엄위(嚴威)하신 분께서 보이신 것보다 관심을 덜 보여서야 되겠는가? 영혼마다 무한한 값을 치르고 산 바 되었으므로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가게 하여 그를 위한 구주의 사랑과 치욕과 고뇌가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죄를 범하는 일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소망, 438)

10.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동참하는 모든 제자들을 향하여 어떤 원칙 안에서 그분을 따르기를 권면하시는가?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예수께서는 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그대의 정력과 능력은 그대가 나의 영을 받는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려면 그대는 나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경쟁심, 이기심, 높은 지위에 대한 욕심 등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부를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부를 구하는 그런 사랑을 가질 것이다.

… 우리가 질고를 아는 자이신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시면서 멸시와 조롱과 경멸을 받으시고 그의 사명을 성취하시기까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쫓김을 받으신 모습을 볼 때, 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큰 피땀을 흘리시고 십자가상에서 고뇌의 죽음을 당하시는 그런 광경을 보고 알게 될 때에 자아는 더 이상 인정받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냉담함과 무기력과 이기심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주님을 위한 진정한 봉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을 위하여 시련이나 치욕이나 박해를 견디기를 기뻐할 것이다.”(소망, 439-440)

실수한 자를 취급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

11. 잘못하거나 실수하는 영혼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심령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2-15)


실수한 자를 취급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레 19:17)는 교훈을 더 구체적인 형태로 반복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의무, 곧 오류와 죄 가운데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등한히 하면, 그는 그 죄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죄악 때문에 마치 우리 자신이 범행한 것과 똑같은 책임을 진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을 행한 자 자신에게 그 잘못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 잘못을 우리들 사이에서 비평이나 비난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혹 교회에 제출된 후일지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실수에 대한 정보는 믿지 않는 세상에게는 다만 장애의 원인이 될 뿐이며,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은 해만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그 자신의 형제들의 비평에서라도 그를 보호해야 하겠거든 하물며 믿지 아니하는 세상의 비난에서 그를 보호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 아니랴! 우리들 자신에게도 실수가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유하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가 피차간에 대접하라고 그분께서는 분부하신다.”(소망, 441)

12. 우리가 혹 실수한 영혼들의 문제를 교회 앞에까지 제시해야 할 경우가 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어떤 믿음으로 영혼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는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마 18:16-18


그대는 하늘의 대사로서 행동하고 있으며 그대의 사업의 결과는 영원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큰 책임을 홀로 지는 것은 아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말씀을 순종하는 곳에서는 어느 곳이든지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다. 교회의 회중에만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느 곳이든지, 그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그곳에도 계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신 말씀에서 인성으로는 제자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시련에 동참하셨으므로 그들의 고난에 동정하셨고, 신성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보좌와 연락을 맺고 계심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셨다.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하늘의 천사들은 사람들과 연합하여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자에게 동조하고 그를 위하여 활동한다. 그리고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함에 있어서 하늘의 모든 능력은 인간의 능력과 연합하기 위하여 임한다.”(소망, 442)


[상고할 말씀]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의인[회개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대]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동역자된 이들은 그리스도의 노선 안에서 일할 것이다. 오해와 몰이해, 번민과 고통 가운데 푹 빠져 있는 가련한 영혼들, 잃어버린 바 된 방황하는 양들이 있다. 그의 마음은 구름에 싸여 있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거의 어떻게 할 수 없는 불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용서와 평강을 애타게 갈망한다.

이런 모습이 그대 앞에 공개될 때,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갈 그리스도인이 전혀 없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이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5). 차갑고 매정한 바리새주의가 그리스도를 따르노라 공언하는 이들을 사로잡고 있으며 예수님의 사랑은 죽었다.”(목사, 351-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