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3 23:20

11. 산상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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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6시 48분


제11과


산상수훈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298-314; 마태복음 5-7장; 산상보훈


기억절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서론 :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가장 높은 인간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명령은 일종의 약속이다. 구속의 계획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을 계획한다. …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자(人子)께서 당신의 생애에서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그들의 생애에서 완전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 … 예수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셨다. 예수의 품성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소망, 311)


산 위에서

1. 예수께서 갈릴리의 한 작은 산에서 특별히 열두 제자에게 안수하시던 날에 그분께서는 열두 사도들과 모인 무리를 위해 어떤 놀라운 수훈을 베푸셨는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산상수훈은 특별히 제자들을 위하여 주신 말씀이지만 무리들이 듣는 데서 말씀하셨다. … 

그들은 평범한 것 이상의 무엇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들은 미구에 왕국이 세워지리라고 믿었으며, 아침에 행하신 일로 미루어 보아 왕국의 건설에 대한 어떤 선포가 곧 있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군중들 또한 전반적으로 기대감을 품고 있었으며, 그들의 깊은 관심은 열성적인 얼굴 모습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푸른 언덕에 앉아서 하늘 교사의 말씀을 고대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미래의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 무리 중에는 증오의 대상인 로마를 지배하고 세계의 대제국의 부귀영화를 누릴 날을 고대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가난한 농민과 어부들은 초라한 가옥과 빈약한 양식과 생애의 수고와 빈곤에 대한 공포가, 윤택한 저택과 편안한 세월로 바뀌어지리라는 보증을 듣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은 낮에는 몸을 가리고 밤에는 이불이 되는 초라한 한 벌 겉옷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정복자들의 호사스럽고 값진 의복을 그들에게 주시기를 바랬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이스라엘이 미구에 주의 택하신 백성으로 열방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고 예루살렘은 전 세계 왕국의 머리로 높임을 받게 되리라는 의기양양한 희망에 부풀었다.”(소망, 298-299)

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저희의 잘못된 관념을 고치기 위하여, 저들의 오류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에 어떤 방법으로 하늘 왕국의 원칙과 자격에 대하여 설명해주셨는가?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2)

“나의 가르침이 비처럼 내릴 것이요,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힐 것이며 연한 풀잎 위에 이슬비 같고 풀밭에 소나기 같으리로다.”(신 32:2, 킹제임스)

시 72:6


그리스도께서는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된다는 희망을 꺾으셨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 가운데서 거짓 교육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과를 회복하시고,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품성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듣는 무리들에게 주시고자 힘쓰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오류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생긴 세상의 불행을 보셨지만, 그 비참한 실상을 그들 앞에 생생하게 묘사하지는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어떤 것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저희의 관념을 공격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에 들어갈 조건들을 말씀하시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들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당신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중요하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도 그들 못지않게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원칙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소망, 298-299)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자들이며, 그들에게 어떤 복이 선언되었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예수께서는 영적 빈곤을 인식하고 구속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복음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에게가 아니라, 겸손하고 죄를 뉘우치는 자들에게 계시되었다. 죄를 씻을 수 있도록 열려있는 샘은 단 하나,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하여 열려 있는 샘이다.

교만한 마음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힘쓴다. 그러나 하늘에 들어가는 자격과 적합성은 그리스도의 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모든 자부심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기 전에는, 주께서는 사람의 회복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시다. 그때에야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필요를 느끼는 영혼에게 주지 않으시고 보류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는’ 예수께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소망, 299-300)

4.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며, 이들에게는 어떤 복이 약속되었는가? 죄로 인한 애통이 아닌 시련과 슬픔의 눈물에도 이 위로의 복을 누릴 수 있는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사 57:18; 렘 31:13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우울해하거나 비애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귀한 특권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악한 행실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슬퍼한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성령께서는 구주를 모욕하고 슬프시게 한 감사하지 아니한 마음을 드러내어 우리로 십자가 밑에서 통회하게 하신다. 모든 죄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다시 상처를 입으시는 바, 우리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예수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뇌를 안겨 준 죄로 인하여 슬퍼하게 된다. 이러한 애통이 죄를 버리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이 슬픔을 연약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것은 통회하는 자를 끊을 수 없는 고리로 무한하신 하나님께 동여매는 능력인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 강퍅함과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은혜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회하는 자의 눈물은 성결의 태양 빛에 앞서 내리는 빗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슬픔은 심령 속에 생명의 샘이 될 기쁨을 선포한다. …

시련과 슬픔 가운데서 우는 자들에게도 또한 위로가 있다. 슬픔과 굴욕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것이 죄 가운데서 방종하는 것보다 낫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 품성 내의 악덕의 중심지를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결함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소망, 300-301)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온유”의 특성은 무엇이며, 이런 품성의 소유자들에게는 어떤 놀라운 복이 약속되었는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요, 화평의 풍요함으로 기뻐하리로다.”(시 37:11, 킹제임스)


온유는 하나님께서 크게 평가하시는 마음의 단장이다.”(성화, 16)

“온유는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견디는 귀한 은혜이다. 온유는 참을성이 있고 모든 형편 아래서 행복하기를 힘쓴다. 온유는 항상 감사하고, 심령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자신의 축복된 노래를 가지고 있다. 온유는 실망과 학대를 참고 보복하지 아니한다. 온유는 침묵하거나 음침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침울한 성질은 온유함의 반대이다. 그것은 상처를 줄 뿐이요, 다른 이들에게는 고통을 가져다주고 자신은 아무런 기쁨도 취하지 않는 까닭이다.”(3보감, 48-49)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우리가 만날 수밖에 없는 어려움들은 그리스도 안에 숨은 온유함으로 말미암아 많이 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의 겸비를 가졌다면, 날마다 겪는 냉담과 거절과 괴로움을 극복할 것이며 이런 것이 심령에 음울함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결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자제이다. 가혹하거나 잔인한 취급을 받을 때 침착하고 신뢰하는 정신을 보존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완전한 품성을 자기 안에 드러내실 권리를 그분으로부터 빼앗는 것이다. 마음의 겸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승리를 주는 능력이다. 이것은 하늘 궁정과 연결된 증거이다.”(소망, 301)

“원수진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고(誣告)를 견디는 쪽이 훨씬 낫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을 품는 자에게는 불행이 초래될 뿐이다. 마음의 겸비,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는 온유는 진정한 축복의 비결이다.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하는 것은 자기희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계 3:21).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시 37:11)게 될 때, 우리는 겸손과 극기를 통하여 그분의 후사가 될 수 있다.”(보훈, 17)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의 갈증은 어떤 생각에서 비롯되는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일으킬 것이며, 이 욕망은 실망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마음에 예수께서 거하실 여지를 만드는 자들은 그의 사랑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닮기를 원하는 자들은 만족함을 얻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결코 예수를 바라보는 자를 돕지 아니하신 채 버려두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물을 가지고 와서 그 영혼에게 보여준다. 만일 그리스도께 눈을 고정시킨다면, 성령의 역사는 그 영혼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아질 때까지 쉬지 않는다. 순결한 사랑의 요소가 심령을 자라게 하여 더욱 고상한 표준과 신령한 사물에 대한 증가된 지식을 얻을 능력을 주어서 충만함에 부족함이 없게 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소망, 302)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누구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인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남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힘을 쓰되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영혼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자비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잘못을 범하는 자들, 시험을 당하는 자들, 궁핍과 죄의 희생물이 된 가련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그들을 도와 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그는 가장 가련하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구원하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시켜 화목의 봉사를 하도록 하신 영혼들을 본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불쌍한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 압박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람들이다.”(보훈, 22)

8.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이치 때문인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모든 불결한 생각은 심령을 더럽히며 도덕심을 해치고 성령의 감화를 소멸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생각은 영적 통찰력을 어둡게 하여 사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주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실 수도 있으시며 또한 용서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용서를 받을지라도 그 영혼은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영적 진리를 분명히 식별하기를 원하는 자는 모든 불결한 말이나 생각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육욕적인 부정(不淨)이나 유대인들이 그토록 엄격하게 피하였던 의식상의 부정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이기심은 우리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기주의적 정신은 하나님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신 분으로 판단한다. 이 생각을 버리기 전에는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이기심 없는 마음, 겸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심령만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을 볼 것이다.”(소망, 302)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만 항간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순결,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육욕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목적과 동기가 진실하며, 교만과 자아 본위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 없고 어린애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질이 같아야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품성의 원칙이 되는 자아 희생적 사랑의 원칙을 생애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보훈, 25)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9. “화평케 하는 자”는 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울 수 있는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진리에서 나온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과 일치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율법과 원수이며 죄인은 그들의 창조주와 원수이다. 그 결과 그들은 피차에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고 말한다. 사람은 화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이 개인이나 사회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려고 계획하나 화평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은 이런 계획이 심령을 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된 화평을 창조하시고 영속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 은혜가 마음에 심기워지면 그것은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는 악한 정욕을 내쫓을 것이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며, 인생의 사막은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 할 것이다(사 55:13, 35:1).”(소망, 302-305)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누구의 본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를 설명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의와 영생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교사로서의 당신의 제자들의 의무를 더욱 명백히 지적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실망과 낙심으로 인하여 자주 고통을 당하고 심한 반대를 만나며 조롱을 당하고 저희의 증언이 거절당할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했던 겸손한 사람들이 저희의 사명을 성취할 때에 중상, 고문, 투옥, 죽음등을 당할 것을 잘 아셨다. …

세상은 죄를 사랑하고 의를 미워하는 바 이것이 바로 세상이 예수를 대적하는 원인인 것이다. 예수의 무한하신 사랑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방해가 되는 요소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은 그들의 죄를 가리고 있던 암흑을 쓸어가 버린다. 그리하여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령의 감화에 순종하는 자들은 자신에 맞서 싸우는 반면 죄에 집착하는 자들은 진리와 진리의 대표자들에 대항하여 싸운다.

이와 같이 분쟁이 일어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협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능욕을 진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자들이 걸어 온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핍박을 슬픔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대할 것이다. 극렬한 시험 하나하나는 그들을 연단시키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 시련 하나하나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동역자로서 그들의 사업을 행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각 투쟁은 의를 위한 큰 전쟁에서 일익을 담당하며, 매 시련마다 그들의 마지막 승리의 기쁨을 더 크게 해 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때,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는 시련을 두려워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기를 열망하고 하나님의 인정하심만을 바라면서,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의 칭찬에 구애됨 없이 모든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소망, 305-30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1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물러가지 말라. 그대는 부패를 막는 소금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향기가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사람들 가운데 거해야 한다.

성령의 감화하심에 응답하는 심령은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는 통로이다. 만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세상에서 제거되고 당신의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물러나신다면 이 세상은 사단의 통치의 열매인 황폐와 파멸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악인들은 비록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이생의 축복까지도 저희가 멸시하고 압박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덕을 입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름에만 그치고 만다면,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그들은 세상에서 유익한 감화를 끼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릇나타냄으로써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소망, 306)

12.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속성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명하신 말씀의 속성과 다른 것인가 아니면 동일한 것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유대인들은 구원의 은혜를 자신의 국가에만 한정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은 햇빛과 같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구원은 온 세상에 속한다. 성경상 신앙은 책갈피 속이나 교회의 벽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가끔 끄집어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젖혀놓아서도 안 된다. 성경상 신앙이란 곧 매일의 생애를 성결하게 하고 모든 사업상 거래와 모든 사교 관계에서 이 신앙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참된 품성은 밖에서 형성되어 장식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밖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한다면, 의의 원칙이 우리 마음에 먼저 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신앙을 공언함으로 신앙의 이론을 선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의 말씀을 확신시키는 것은 실제적인 경건이다. 언행이 일치하는 생애, 거룩한 담화, 요동하지 아니하는 성실성, 능동적이고 동정이 많은 정신, 경건한 모본, 이것들은 빛을 세상에 전달하는 매개물이다.”(소망, 306-307)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3. 예수님 시대에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3)


랍비들은 저희의 의가 하늘에 들어가는 통행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 의가 불충분하며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셨다. 외관적 의식과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이 바리새인의 의의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랍비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여진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의와 신앙을 분리시켰다. 의식의 준수에는 철저한 반면에, 저희의 생애는 부도덕하고 저속하였다. 그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그런 의는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 …

같은 위험이 지금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어떤 신학적 교의(敎義)에 동의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당연히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실생활에 실천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믿고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결하게 하는 진리를 통하여 오는 능력과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저희를 진실하고 친절하고 참고 관용하고 거룩한 마음을 갖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신앙을 소유한 자들에게 저주가 되고 그들의 감화로 말미암아 그것은 세상에 저주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의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뜻에 마음과 생애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죄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산 연락을 유지할 때에만 의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될 때에 참된 경건이 사상을 향상시키고 생애를 고상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면 신앙의 외관적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내적 순결함과 일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봉사에 요구되는 의식들은 위선적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같이 무가치한 예식이 되지 아니한다.”(소망, 309-310)

14. 그리스도인 품성의 최고의 이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님의 품성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가장 높은 인간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명령은 일종의 약속이다. 구속의 계획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을 계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겸비한 영혼에게서 죄를 분리시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모든 회개하는 영혼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전할 만반의 대비책을 세우셨다.

… 거룩한 기질,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모든 회개하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자(人子)께서 당신의 생애에서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그들의 생애에서 완전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 … 예수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셨다. 예수의 품성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소망, 311)

“율법은 의, 즉 의로운 생애,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지만, 인류는 그 요구에 미칠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계발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소망, 762)


[상고할 말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만일 과실이 맛없고 가치가 없다면 그 나무는 나쁜 나무이다. 그와 같이 생애 가운데 열리는 열매는 마음의 상태와 품성의 탁월성에 대하여 증언해 준다. 선한 행위로 결코 구원을 살 수 없지만 그것은 사랑으로 행하고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믿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영원한 상급은 우리의 공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행하여진 행위에 비례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원칙을 제시하시고, 그 원칙들이 생애의 대 강령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교훈을 인상 깊게 하시기 위해 한 예증을 첨가하셨다. 그대가 나의 말을 듣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대는 순종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의 품성의 기초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는 흐르는 모래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인간의 이론과 창안 위에 그대의 집을 세운다면 그것은 무너질 것이다. 시험의 바람과 시련의 폭풍우로 말미암아 그 집은 쓸려감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이 원칙들은 길이 존속할 것이다. 나를 영접하라. 나의 말씀 위에 건설하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7:24, 25).”(소망,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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