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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베데스다와 산헤드린 (1)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201-205; 요한복음 5:1-19


기억절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 5:8-9)


서론 :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아무런 보증도 그에게 주지 않으셨다. 그 사람은 멈추어 의심하여 그가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하자 힘을 얻었다.”(소망, 203)


유월절과 베데스다와 안식일

1. 예수님께서는 어느 명절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며, 기도와 명상 중에 어디에서 발걸음을 멈추셨는가?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요 5:1-4)


이 못의 물은 때때로 움직였으며 일반적으로 이 일은 초자연적 능력의 결과로서 누구든지 물이 요동한 후에 이 물속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그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든지 나음을 받는다고들 믿었다. 수백명의 환자들이 그곳을 방문했으나 물이 요동할 때에는 무리가 너무 많아서 자신들보다 약한 남자, 여자, 아이들을 발로 짓밟으면서 서로 앞을 다퉈 밀려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못 가까이에 갈 수도 없었다. 못 가까이에 이르기에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그 못 바로 옆에서 죽었다. 그곳에는 오두막이 세워져서 환자들이 낮의 뜨거움과 밤의 냉기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거기에는 날마다 고침을 받겠다는 헛된 소망을 안고 연못가에 기어와서 이 행각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었다.”(소망, 201)


※ 이 명절이 유월절임에 대하여는 SDA성경주석, 요 5:1을 참조하시오.

2.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병자들의 비참한 광경을 목도하셨을 때 어떻게 하시기를 갈망하셨는가? 그러나 이날은 무슨 날이었는가?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 5:9)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외관상 명상과 기도를 하시는 모습으로 홀로 걸으시다가 그 못에 이르셨다. 그는 비참한 환자들이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치유력을 행사하셔서 모든 고통당하는 자를 건강하게 하시기를 갈망하셨다.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무리가 경배하기 위하여 성전에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치료의 행위가 유대인들의 편견을 자극시켜서 당신의 사업의 수명을 짧게 단축시킬 것을 아셨다.”(소망, 201-202)

38년 된 병자의 속절없는 희망

3.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어떤 병자에게 주목하셨는가? 그는 어떤 형편에 처해 있었는가?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요 5:5-6)


그러나 구주께서는 한 사람의 가장 처참한 형편을 보았다. 그는 38년간을 속절없는 앉은뱅이로 지내 온 사람이었다. 그의 질병은 대체로 그 자신의 죄의 결과였으며,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그 환자는 홀로 쓸쓸하게 자기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겼다고 생각하면서 오랜 불행의 세월을 보내왔다. 물이 요동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에는 그의 무력함을 측은히 여기는 사람들이 그를 행각에까지 실어다 주곤 하였다. 그러나 꼭 혜택을 입어야 할 그 순간에 그를 도와서 물속에 들어가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못가에서 더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보다 힘센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앞서 뛰어 들어가곤 하였다. 그는 이기적이며 광분(狂奔)하는 무리와 경쟁할 수 없었다.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그의 집요한 노력과 근심과 계속적인 실망은 그의 남은 기력을 신속히 빼앗아가고 있었다.”(소망, 202)

4.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으로 그 병자의 주의를 끄셨는가? 그러나 병자의 희망은 왜 이내 시들고 말았는가?

예수께서 …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그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때때로 그 못을 바라보려고 머리를 들곤 하였다. 바로 그때에 한 부드럽고 연민 가득한 얼굴이 그를 굽어보며 말하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말에 그의 주의가 끌렸다. 그의 마음속에는 희망이 솟아났다.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타오르던 용기는 곧 시들어졌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자주 그 못에 들어가려고 애썼던가를 상기했다. 이제 그는 물이 다시 동할 때까지 살아 있을 가망조차도 거의 없었다. 그는 지쳐서 얼굴을 돌리고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하였다.”(소망, 202)

말씀을 붙잡는 믿음 – 믿음의 실상은 말씀 안에!

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낙심한 병자에게 무엇을 명령하셨는가? 그는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 5:8-9)


예수께서는 이 환자가 당신을 믿는 믿음을 활용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는 단순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만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사람의 믿음은 그 말씀을 굳게 붙잡는다. 모든 신경과 근육이 새로운 생명으로 전율하고, 절던 그의 다리는 건강하게 움직인다. 그가 의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자기의 뜻을 정하자 그의 모든 근육이 그의 의지에 응답한다. 자기의 다리로 일어서면서 그는 자기가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아무런 보증도 그에게 주지 않으셨다. 그 사람은 멈추어 의심하여 그가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하자 힘을 얻었다.”(소망, 202-203)

6. 영적 질병의 치유에 있어서도 이 병자를 치유한 어떤 믿음이 똑같이 요구되는가? 1888년에는 어떤 소중한 진리가 교회에 전해졌는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우리도 같은 믿음을 통하여 영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왔다. 우리의 영혼은 마비되어 있다. 그 쇠잔한 사람이 걸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력함을 깨닫고 그들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만들 영적 생명을 갈급한다. 그들은 헛되이 그것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부르짖는다. 이러한 낙심하고 몸부림치는 자들은 위를 쳐다보라. 구주께서는 자기의 피로 사신 자들을 굽어보시고 말할 수 없는 연민과 긍휼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대에게 건강과 평안 가운데서 일어서라고 명하신다. 그대가 완쾌됐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의 말씀을 믿으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편에 두라. 그를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때에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거기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며 또한 구출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죄로 죽었던’(엡 2:1)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는 연약과 불행과 죄의 사슬에 매인 포로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소망, 20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하는 바를 스스로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그 말씀한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들어 있으므로 그 말씀에서 말씀하는 일을 창조할 수 있으며, 믿음은 말씀 자체가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A.T. 존스, 리뷰 앤 헤랄드 1898.12.27)

속박의 멍에가 된 율법 – 안식할 수 없는 안식일

7. 나음을 입은 사람은 자리를 든 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가던 중 누구를 만났는가? 바리새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치유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무엇에 주목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 5:10)


그는[38년 된 환자] 하나님을 찬양하고 새로 얻은 힘을 기뻐하면서 굳세게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자기 길을 서둘러 가고 있을 때에 몇 사람의 바리새인을 만났다. 그는 즉시 그들에게 자기의 병 나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그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냉담하게 듣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왜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가지고 다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주의 날에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엄격히 그에게 상기시켰다. 그 사람은 기뻐서 그날이 안식일인 줄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능력을 받으신 분의 명령을 순종한 데 대하여 하등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대담하게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그들은 이를 행한 이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그는 말할 수가 없었다. 이 관원들은 오직 한 분만이 이 이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행한 것이 예수라는 직접적인 증거를 잡으려고 했는데, 이는 예수를 안식일을 어기는 자로 정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판단에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앓는 사람을 고치심으로 율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명함으로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다.”(소망, 203-204)

8.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가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율법에 대하여 얼마나 오해하고 곡해시켰는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유대인들은 율법을 너무나 왜곡해서 그 율법을 속박하는 멍에로 만들었다. 그들의 무의미한 법칙들은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특별히 안식일은 갖은 형태의 무의미한 규칙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식일은 그들에게 즐거운 날도, 여호와의 성일도, 존귀한 날도 아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준수를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불을 켜거나 심지어 촛불을 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들의 규칙상 그들 스스로 행하는 것이 금지된 많은 일들을 이방 사람에게 의존하였다. 그들은 만일 그런 행위가 죄가 된다면 다른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것들을 하게 하는 사람도 그들이 스스로 그 일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이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어 있으며, 모든 다른 사람들의 형편은 이미 소망이 없는 까닭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나빠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의해 순종될 수 없는 계명은 하나도 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불합리하거나 이기적인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다.”(소망, 204)

산헤드린 앞에 소환되신 그리스도

9. 예수께서 산헤드린 앞에 소환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증거하셨는가?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 5:16)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앞에 끌려 나와 안식일을 어기셨다는 고소에 답변하시게 되었다. 이 때에 만일 유대인들이 독립 국가를 가졌었다면, 이러한 고소는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에 처할 권한이 없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소는 로마의 법정에서는 중하게 취급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달성하기를 바라던 다른 목적들이 있었다. 사업을 방해하려는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끼치는 감화는 심지어 예루살렘에서까지도 그들의 감화보다 더 크게 증대하여 가고 있었다. 랍비들의 연설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무리들이 예수의 가르침에는 마음이 끌렸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안위를 받았다. 예수는 하나님이 복수하는 재판장이 아니요 온유하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며 자기 안에 반사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말씀은 상한 심령에 향기와 같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자비로우신 행위로서 낡은 유전과 사람이 만든 계명의 가혹한 권세를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함이 없는 충만함으로 제시하셨다.”(소망, 204-205)

10. 그리스도의 사업은 만일 방해받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유래없는 개혁을 일으켰을 것이나, 그분의 사업을 누가, 왜 결사적으로 반대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유대인과 로마에게 어떤 죄인으로 몰고 갔는가?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초기의 예언 중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백성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무리들의 공감하는 마음들은 제사장들이 요구하는 고루한 의식보다 사랑과 자비의 교훈을 받아들였다. 만일 제사장들과 랍비들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이 세상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그런 개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의 감화를 꺾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예수를 산헤드린 앞에서 고소하고 그의 교훈을 공공연히 비난한다면 그것은 이 일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랍비의 요구를 비난하거나, 그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짐을 덜어 주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성모독죄뿐 아니라 대역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랍비들은 이런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혐의를 일으키기를 바랬다. 그들은 예수께서 확립된 관습을 전복하여 백성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켜서 완전히 로마에 예속시키기 위한 길을 예비하려고 힘쓰고 있다고 말하였다.”(소망, 205)


[상고할 말씀]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바’이다.”(A.T. 존스, 리뷰 앤 헤랄드 1899.1.31)

“그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물, 곧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대 속에 가지기를 원하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영광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가?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생명의 떡, 하나님의 말씀을 주린 심령으로 성경을 탐구하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라. 그대의 영혼의 거룩함과 의는 그 명령에 순종하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도록 하라.-영문시조, 1895.9.5”(말씀과 능력,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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