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유월절의 경험들

by 청지기 posted Feb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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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유월절의 경험들

[연구범위]
출애굽기 12장, 부조와 선지자 278-280쪽.

기억절 :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3-14)

서론 : “아무도 인간의 어떤 공적이 자신이 지은 죄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제한되고 편협한 견해를 주장하지 말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치명적인 기만이다. … 이 문제를 밝히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수천수만의 영혼들이 저들 자신의 행함을 의존함으로 마귀의 자녀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한 행실을 요구하셨고 율법 역시 선한 행실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선행이 전혀 무가치한 죄 가운데 처하므로 오직 예수님의 의만이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1기별, 343)


공포의 밤

1. 애굽 전역에서 큰 호곡소리가 일어날 때 이스라엘 진영에는 어떠하였는가?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출 12:29-30)
출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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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애굽 전토에 걸쳐 각 가정의 자랑거리인 장자가 죽어 넘어졌다. 슬퍼하는 자들의 비명과 통곡 소리가 온 하늘을 메웠다. 창백한 얼굴을 한 왕과 조신들은 사지를 떨면서 무서운 공포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로는 자기가 한때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고 외쳤던 일을 회상했다. 이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교만은 땅에 떨어졌고 그는 ‘밤에 …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였다.”(부조, 280)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었고 혈기 왕성한 장년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들의 심장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두근거렸다. 부모들은 그 밤에 내리기로 되어 있는 무서운 재앙을 생각하고 팔로 사랑하는 장자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죽음을 관장하는 천사가 방문하지 않았다. 구주의 보호의 표인 피가 그들의 문에 발리워져 있었으므로 멸망시키는 천사가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다.”(부조, 279)


2. 죽음을 관장하는 천사들이 애굽 땅을 칠 때에 피가 있는 집은 넘어갔다. 그 피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적하고 있는가?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막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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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담의 사형 집행이 즉각 시행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대속의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의 죄를 몸소 지시고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죄 값을 지불하기를 자원하셨다. 하나님께서 만일 아담의 죄를, 속전을 받지 않고 용서하셨다면 죄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영원히 계속되었을 것이다(리뷰 1901. 4. 23).”(화잇주석, 창 2:17)
“아무도 인간의 어떤 공적이 자신이 지은 죄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제한되고 편협한 견해를 주장하지 말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치명적인 기만이다. 만약 그대들이 이 뜻을 이해하려면 그대들은 반드시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언쟁하는 일을 그쳐야할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대속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밝히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수천수만의 영혼들이 저들 자신의 행함을 의존함으로 마귀의 자녀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한 행실을 요구하셨고 율법 역시 선한 행실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선행이 전혀 무가치한 죄 가운데 처하므로 오직 예수님의 의만이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 … 인간이 범하는 어떤 죄든지 갈바리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열렬한 호소로서 계속적으로 죄인에게 철저한 속죄를 제공하고 있다.”(1기별, 343)

참고 : 어린양이 흘린 피는 대속의 진리를 상징하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곧 대속의 길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아담은 물론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은혜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죄를 짓는 즉시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양의 피

3. 유월절 양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였다. 양을 잡았으나 그 피를 뿌리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되었을까?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6-7)
고전 5:7(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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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제물로 바쳐진 새끼양은 우리들의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의 어린양’ 곧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사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고 말한다. 유월절 양을 죽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했다.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하였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각 영혼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속죄의 희생의 공로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한다.”(부조, 277)
“노예들은 자유를 얻기 전에, 이제 곧 성취될 큰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보여야 했다. 피의 표적이 그들의 집에 있어야 했으며, …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지시 중에 한 가지라도 무시했거나, … 어린양은 잡았지만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거나, 그들의 집 밖으로 나간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은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필요되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하더라도 정직하게 믿었을지라도 그들의 성실함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멸망시키는 천사의 손에 그들의 장자를 잃을 것이었다.”(부조, 278)


4.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피를 바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것은 어떤 진리를 상기시켜 주는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고후 7:1; 요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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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삶의 성화만이 하나님께 가납된다. 그 천사는 바르지 못한 목사들을 지적하면서 말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고결함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마음속의 진리는 거룩한 영의 영향을 통하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온전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2증언, 335)
“우리 신자들이 세상의 역사가 전개되는 그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있습니까? … 우리들의 생애가 세련되고 정결하게 되며 거룩하신 분의 모습을 반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관심이 되어 있습니까?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어린 양의 피로 씻고 희게 함을 입을 무리 가운데 속해야할 모든 영혼들의 체험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의의 대열에 참가해야만 합니다.”(1기별, 56)
참고: 문인방과 좌우설주는 인간의 마음(이마)과 행동을 상징하기에 적합하다.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피를 발라야 한다는 말씀은 성화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5. 어린 양의 피는 어떻게 뿌려야 하였는가?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출 12:22)
히 9:19; 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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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뿌릴 때에 사용된 우슬초는 정결케 함의 상징이었으며 문둥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짐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들을 정결케 하는데 쓰였다. 시편기자의 기도 가운데도 우슬초의 의미가 나타나 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부조, 277)
“나는 그대에게 우리 구주의 자아부인과 겸손과 희생의 생애를 제시한다. 하늘 임금, 영광의 왕께서 그분의 부귀와 광채와 명예와 영광을 버리시고 죄인을 구하시려고 비천함과 가난과 수치의 삶을 사시고자 내려오셨다.”(2증언, 490)
참고: 우슬초는 정결의 상징이면서 또한 겸손을 상징한 식물이기도 하다.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왕상 4:32, 33).에서 우슬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식물을 대표한다.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품성을 상징하면서 또한 구속받은 죄인들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고기를 먹음

6. 유월절 양을 잡고 그 피를 바른 후에 고기는 어떻게 해야 했는가? 어떻게 요리해서 먹어야 하는가? 이것은 어떤 상징적인 진리를 의미하고 있는가?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출 12:8-9)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4, 56)
마 10:38; 히 5:7-9; 벧전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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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가족들은 집안에 모였고 유월절 양을 잡아 그 고기를 불에 구웠다. 그리고 무교병과 쓴 나물도 준비되었다.”(부조, 279)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심으로 어떤 인간도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셨다.”(소망, 694)
참고: 고기는 날로나 삶아서 먹지 않고 구워서 먹어야 했다. 생고기나 삶는 방법보다는 구울 때에 가장 강한 열이 가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죄로 말미암아 당하신 고통을 상징하기에 적합하다. 그분은 율법의 저주,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돌아가셨다.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부르짖음은 이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 또한 얼마나 고통스런 방법으로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7. 유월절 희생양의 구운 고기는 무엇과 함께 먹어야 했는가? 이것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회상하면서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생애를 상기시켜주는가?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출 12: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벧전 4:13; 시 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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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고기는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는데 이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때의 고통을 회상하기 위함이었다.”(부조, 278)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정화시키시고 깨끗케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쓴 잔을 마시도록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쓰디쓴 잔이다. 그런데 그들은 불평하고 한탄하고 투덜거림으로서 그 잔을 더욱 쓰게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잔을 받는 자들은 또 다른 잔을 더 마셔야 하는데 그 까닭은 첫 번째 잔이 그의 마음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두 번째 잔도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면 저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또 다른 잔을 계속 마셔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속에 더럽고 불결한 것들이 그냥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쓴 잔이 인내와 오래 참음과 기도로서 달게 될 수 있음을 보았는데, 그것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들의 마음속에 의도한 효과를 나타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초기, 46)


고난의 떡

8.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킬 때에 칠 일 동안 무엇을 먹도록 지시를 받았으며 이 지시를 어기는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이었는가? 고난의 떡은 어떤 영적 의미를 상징하는가?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출 12:15)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 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신 16:3 상단)
사 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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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의 풀무 가운데서 항상 시험을 받고 있다. 만약 그들이 첫 번째의 시련을 잘 참아내면 그들은 그와 비슷한 두 번째의 시련을 겪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면, 그 시련은 다시 주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매 번 더욱 힘들고 그 강도가 더욱 심한 것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 앞에 기회 위에 기회가 거듭 주어져서 승리를 얻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증명해 보이게 하신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계속 반역하면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에게서 빛도 성령도 다 거두어 가신다(원고 69, 1912).”(화잇주석, 사 48:10)
“주께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디를 깨끗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시련의 풀무 속에서 온전히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은을 정련하시는 연단자로서 그분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일 때까지 그분의 자녀들을 순결케 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계신다. 비록 고난의 불길이 우리 주위를 태우고 때로는 그 불이 우리를 완전히 삼키지나 않을까하여 두려울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은 이때에도 우리가 승리한 후 그분 안에서 마음이 자유로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하고 있다. 풀무불은 순결하고 세련되게는 하지만 삼키고 멸망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가운데서 레위 자손을 정결케 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우리를 연단하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제물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안교 일꾼 1905. 2. 7).”(화잇주석, 말 3:3, 4)


9. 칠 일 동안 누룩은 얼마나 철저하게 제거되어야 했는가? 누룩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칠 일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너희 곳에 있게 하지 말며 네 지경 안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도 말게 하며”(출 13:7)
“그 칠 일 동안에는 네 사경 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신 16:4 상단)
고전 5:8; 막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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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이 죄의 누룩도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영양을 받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소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 8)라고 편지하였다.”(부조, 278)
“그분은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 외식은 마치 누룩이나 이스트와 같다. 누룩은 밀가루 속에 섞여서 숨겨지기 때문에 그것의 결과가 드러날 때까지는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누룩은 교묘하게 그 세력을 확장해서 곧 온 덩어리에 퍼진다. 외식은 은밀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만약 사람이 이 죄에 빠져들면 그것은 교만과 헛된 것들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 지금은 옛날 바리새인들이 상투 수단으로 사용했던 속임수와 비슷한 속임수가 횡행하는 세상이다. 구주께서 이와 같은 주의를 주셨을 때 그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조심하라는 경고인 것이다.(원고 43, 1896).”(화잇주석, 눅 12:1)
참고: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말한다. 누룩은 자연계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발효물질이기에 성경에서는 누룩이 부정과 도덕적 부패를 가져오는 죄를 상징하는 물질로 대표되었다. 또한 우리들의 생애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철저한 회개가 요구됨

10. 죄를 상징하는 누룩을 없애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얼마나 철저한 회개가 필요한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겔 18:30)
시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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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다시 회개할 것 없는 회개를 경험하지 아니하고 죄를 미워하는 가운데서 심령의 참된 겸비와 통회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지 아니하였을 것 같으면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죄의 사유를 구한 것이 아니요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평강을 얻지 못한 자이다. 우리가 과거의 지은 죄의 사유함을 받지 못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겸비하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진리의 말씀에 응종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까닭이다.”(정로, 38)
“인간 자녀들의 행동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작성되고 있다.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분의 눈을 피해 숨기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정반대되는 길을 택한 후 그들의 악한 길을 은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음을 공언한다. 이 공언한 거룩함은 그들의 매일의 생애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고상하게 하거나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살전 5:22)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과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1보감, 111)


[상고할 말씀]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 받으시는바 되지 못한다. 반드시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나니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로 될 것이다. 우리로서 하여야 할 일은 분명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6, 17).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겔 33:15). 사도 바울은 회개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죄가 도덕적 지각을 둔하게 하는 때에 그 악행하는 자는 자기의 품성의 결점을 분별치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범한 죄의 흉악함을 깨닫지도 못하나니 악행하는 자가 죄를 깨닫게 하는 성신의 능력에 복종하지 아니하면 그가 아직도 자기 죄에 대하여 눈먼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의 자복은 진정하지 못하고 간절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기 죄를 자복할 적마다 자기 행위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여사여사한 사정이 없었다면 자기는 비난받는 바 그 일을 아니하였으리라고 한다.”(정로, 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