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청교도와 신교의 자유

by 청지기 posted Sep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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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6시 34분


제12과


청교도와 신교의 자유


[연구범위]

각 시대의 대쟁투, 289~298


기억절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서론 :  그들[청교도들]이 이와 같은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도록 하시고자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교회가 그처럼 낮추어진 것은 후에 다시 높여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에 보여 주시고자 당신의 능력을 교회를 위하여 바야흐로 나타내실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사단의 분노와 악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생긴 여러 가지 사건을 눌러 버림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동시에 당신의 백성을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시고자 하셨다. 박해와 망명은 자유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쟁투, 291)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종교계의 형편

1.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의 교리는 버렸지만, 어떤 면에서 아직도 로마교의 그늘 아래 있었는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의 교리는 버렸을지라도 그 교리의 여러 가지 형식은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로마교의 권위와 신조는 부정되었을지라도 그 관습과 의식은 영국 교회의 예배에 적지 않게 혼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며, 성경에 특별히 명령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되었다. 또 그들이 그와 같은 것들을 지킴으로 로마교와 개신교와의 간격을 좁히는 동시에 로마교로 하여금 신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해석되었다.

보수적이요 타협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논증들이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관습을 그대로 지키게 되면 ‘로마교와 종교 개혁파 사이에 생긴 깊은 구덩이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단연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의식들을, 거기에서 해방된 후 다시 되돌아갈 마음조차 없는 노예 제도의 휘장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예배에 관한 규칙을 정하여 주셨으므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하거나 감할 자유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큰 배교의 발단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교회의 권위를 첨가하려고 시도하는 데 있었다. 로마교는 하나님께서 금하지 아니한 것을 하라고 명령함으로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을 금지함으로 끝을 맺었다.”(쟁투, 289, 290)

2. 교회가 국가의 권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영국 교회의 형편 때문에 청교도들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어떤 피난처를 찾고 있었는가?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마 10:23)


많은 사람은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던 순결과 단순성으로 돌아가고자 열망하였다. 그들은 영국 교회가 세운 대부분의 관습들을 우상 숭배의 유물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영국 교회의 예배에 연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회는 국가의 권력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교회의 의식에 반대하는 일이 용납될 수 없었다. 예배에 출석하는 일은 법률로써 요구되었으며, 허가 없이 종교적 예배를 위한 집회를 여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것을 범하는 자는 투옥, 추방, 사형 등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17세기의 초엽에 영국의 한 왕은 즉위하자마자 청교도들을 복종시키든지 괴롭혀 그 땅에서 내쫓든지 혹은 그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게 하든지 하겠다는 자신의 단호한 결심을 표명하였다. 수색당하고, 추방당하고, 박해를 받은 그들은 그들의 장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바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면 ‘영국은 이미 영구적으로 거주할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어떤 사람들은 마침내 네덜란드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그들은 어려움과 손실과 투옥 등을 당하였다. 결국 그들의 목적은 좌절당하고, 그들은 원수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참고 견딘 결과로 마침내 그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호적인 영접을 받게 되었다.”(쟁투, 290)

청교도들의 아메리카 이주

3. 도피해 갈 때, 청교도들은 집과 재산과 생활 수단 등을 모두 버려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망명과 고난 중에서도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주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필요를 따라 주님께서는 항상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다. 주님의 천사들은 그들의 곁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붙들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이 멀리 바다 저편에서 그들이 건설할 나라, 신교의 자유라는 귀중한 유업을 자손들에게 남겨 줄 땅을 가리켜 주시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길을 따라 전진하였다.

그들[청교도들]이 이와 같은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도록 하시고자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교회가 그처럼 낮추어진 것은 후에 다시 높여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에 보여 주시고자 당신의 능력을 교회를 위하여 바야흐로 나타내실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사단의 분노와 악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생긴 여러 가지 사건을 눌러 버림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동시에 당신의 백성을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시고자 하셨다. 박해와 망명은 자유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쟁투, 291)

4. 이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더 멀리 아메리카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서 온 아메리카에서 오래지 아니하여 왜 또다시 박해가 일어났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 순례자들을 고무시켜 긴 여행의 위험을 용감하게 뚫고 바다를 건너가게 하고, 황량한 들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위험을 견디어 내게 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메리카의 해변에 큰 나라의 기초를 세우게 한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종교 자유의 위대한 원칙을 아직껏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드려서 얻은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균등하게 나누어 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다. …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고 이단을 정죄하여 처벌할 권한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하셨다는 교리는 가장 깊이 뿌리를 박은 법왕교의 오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개혁자들은 로마교의 신조를 부인하면서도 로마교의 비관용적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랫동안의 법왕교의 지배 아래 전 그리스도국에 퍼져 있던 짙은 흑암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 교회의 교인들만이 세상 정부에 대하여 발언권을 가진다는 규정이 이주민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일종의 국교회(國敎會)가 형성되었고, 모든 사람에게는 교직자를 부양하는 데 필요한 기부가 강요되었다. 그리고 장관들에게는 이단을 박멸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리하여 속권이 교회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조치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오래지 아니하여 박해가 일어났다.”(쟁투, 292, 293)

신교 자유의 투사, 로저 윌리엄스

5.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신대륙에 온 로저 윌리엄스(1603~1683)는 초기의 순례자들과는 달리 신앙상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어떤 원칙을 주장했는가?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 22:21)


최초의 식민지가 개척된 지 11년 후에 로저 윌리엄스가 신대륙으로 왔다. 초기의 순례자들처럼 그도 역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그곳으로 왔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당시에 그것을 인정한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마는, 신조가 아무리 다를지라도 자유는 각 사람에게 속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는 열렬한 진리의 탐구자로서 로빈슨처럼 성경에 있는 빛이 이미 다 제공되어 그 이상 더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근세의 그리스도교국에 양심의 자유, 곧 누구든지 법률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신조에 기초하여 민권 정치(民權政治)를 확립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윌리엄스는 범죄를 그치게 하는 것이 국가 행정자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양심은 결코 지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일반 민중이나 장관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은 결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의무를 규정하려고 하면, 그것은 월권이요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장관이 그와 같은 권리를 소유하게 되면, 마치 영국에서 어떤 국왕이나 여왕이 한 것처럼, 그리고 로마교에서 어떤 법왕이나 의회가 한 것과 같이 오늘 한 가지 주장이나 신조를 세웠다가 내일 다른 주장으로 바꾸게 되어 결국 신조에 많은 혼란을 가져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쟁투, 293, 294)

6. 로저 윌리엄스는 새로운 신조를 주장함으로 추방 명령을 받고 도망하다가, 자신의 주장을 최초로 승인하는 어떤 주(洲)의 기초를 놓았는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로저 윌리엄스는 충실하고 특이한 재능을 갖춘 목사로서 품성이 고결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위정자가 교회를 지배하는 권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일과 신교 자유에 대한 위정자의 요구에 항거하는 일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조의 주장은 ‘국가의 정치와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온 식민지들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체포를 면하기 위하여 추운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인적도 없는 산림 속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수개월 동안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끝에 그는 마침내 내러건세트 만(灣)에 도착하여 거기서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근세의 신앙 자유의 권리를 철저하게 승인하는 최초의 주(州)의 기초를 놓았다. 로저 윌리엄스의 식민지의 근본 원칙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양심의 빛을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자유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의 작은 주(州), 로드 아일랜드는 박해로 고난당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차츰 사람의 수가 증가되어 번창해졌다. 그리고 그 주의 기본 원칙, 곧 정치와 종교의 자유가 마침내 북미 공화국의 초석이 되었다.”(쟁투, 294, 295)

신교 자유의 정신과 미국의 헌법

7. 미국의 권리장전으로 밝힌 위대한 독립 선언서에서 종교의 자유는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우리의 조상들이 그들의 권리장전(權利章典)으로 밝힌 위대한 독립 선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천명하였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들에게는 조물주께로부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었으며, 그 권리 가운데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주장한다.’ 또한 헌법에도 극히 명백한 말로써 양심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이 보증되어 있다. ‘합중국은 어떤 공직(公職)에 대한 자격으로서 종교적인 시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 의회는 종교의 설립에 관여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금지하는 어떠한 입법도 하지 않을 것이다.’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법률 위에 있다는 것과 양심의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영원한 원칙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진리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론을 전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속에 깨닫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은 인간의 법률을 대항할 때 고난과 화형을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의 법령보다 더욱 우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사람이 자기들의 양심을 지배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느끼었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뿌리 뽑을 수 없는 천부(天賦)의 원칙이다.’”(쟁투, 295, 296)

8. 종교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그리스도인들은 북미 대륙의 어디에 정착했으며, 이들은 미국을 어떤 위대한 원칙을 실증한 나라로 발전시켰는가?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6, 17)


사람이 자기의 수고의 대가를 받고 자기의 양심의 지시대로 생활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소식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 전하여지자 무수한 사람이 북미 대륙으로 모여들었다. 식민지의 인구는 갑자기 늘어났다. ‘매사추세츠 주는 특별한 법률을 제정하여 전란과 기근과 박해자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오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환영하고 공금(公金)으로 그 일을 원조하였다.’ 그리하여 망명자와 압박당하는 자들이 법적으로 공화국의 손님이 되었다. 플리머스(Plymouth)에 처음으로 상륙한 때로부터 20년 후에는 수천 명의 필그림들(Pilgrims 순례자 즉 신앙의 자유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자들-역자 주)이 뉴잉글랜드(新英州)에 정착하였다. …

성경은 신앙의 기초요, 지혜의 근원이며, 자유의 헌장(憲章)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았다. 성경의 원칙을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열심히 가르쳤고, 그 결과로 검소, 명철, 순결, 절제 등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청교도들이 거주하는 곳에 여러 해 동안 살지라도 ‘한 사람의 술주정뱅이를 보거나 한 마디의 욕설을 듣거나 한 사람의 거지도 만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경의 원칙은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안전책이 된다는 것이 분명히 실증되었다. 미약하고 외로웠던 식민지는 강대한 합중국으로 자라났고, 세계는 ‘법왕 없는 교회, 왕 없는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놀라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쟁투, 296)

미국 종교계의 타락

9. 그러나 계속적으로 미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됨에 따라 본래의 청교도의 정신은 점점 흐려져 갔다. 교회의 부패를 초래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2, 18, 19)


그러나 계속적으로 미국의 해안으로 건너오는 많은 사람들은 당초의 필그림들과는 전연 다른 목적으로 오게 되었다. 초기의 신앙과 순결이 넓은 범위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세속적 이익만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됨에 따라 본래 정신은 점점 흐려져 갔다.

오직 교회의 교인만이 투표권을 가지며 정부 기관의 공직을 얻을 수 있도록 초기의 이주민들이 채택한 규정은 가장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법안은 주(州)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한 방편으로 채택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부패를 초래하였다. 신앙 고백이 참정권과 관직을 얻는 조건이 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변화 없이 다만 세속적 정책이 동기가 되어 교회에 입교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들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성직자들 중에서도 교리상의 오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의 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흔히 보는 나쁜 결과가 다시 나타났다. 곧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복음 사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의 권력에 호소하여 그 도움을 얻어서 교회를 세우고자 시도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외관상으로는 세상을 교회 편으로 가까이 접근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교회를 세상 편으로 더욱 가까이 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쟁투, 297)

10. 그들의 자손들은 개혁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일에 실패하여 마침내 개신 교회도 큰 개혁이 필요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로빈슨과 로저 윌리엄스가 옹호한 위대한 원칙을 잊어버렸기 때문인데, 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5)


로빈슨과 로저 윌리엄스가 훌륭하게 옹호한 위대한 원칙, 곧 진리는 점진적인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빛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그들의 자손들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국의 개신교도들은, 유럽의 개신교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종교 개혁의 풍성한 축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개혁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비록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고 오랫동안 고집하여 오던 오류를 폭로하였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루터 당시의 법왕교도들과 같이 그들의 조상들이 믿던 것처럼 믿고, 그들이 생활하던 것처럼 생활하는 것을 만족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종교는 다시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계속해서 따라갔다면 당연히 배척할 수밖에 없는 미신과 오류를 간직하고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고무되었던 정신은 점차 사라져 버렸고, 마침내 루터 시대의 로마 교회처럼 개신 교회도 큰 개혁이 필요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똑같은 세속화와 영적 혼미 상태, 인간적 의견의 존중, 그리고 사람의 이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대신하는 일이 있었다.”(쟁투, 297, 298)

재개혁의 필요성

11. 19세기 전반(前半)에 성경이 널리 반포되어 세계는 큰 빛을 받았으면서도, 사람들이 계시된 진리의 지식을 따라 전진하거나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19세기 전반(前半)에 성경이 널리 반포되어 세계는 큰 빛을 받았으나, 사람들은 계시된 진리의 지식을 따라 전진하거나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지 않았다. 전 시대처럼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감출 수 없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경하게 여기게끔 이끌었다. 사람들은 성경 연구를 게을리하게 되었으므로, 계속해서 거짓 해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성경에 아무 근거도 없는 교리를 간직하게 되었다.”(쟁투, 298)

12. 핍박으로 진리를 깨뜨려 버리고자 했던 자기의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사단은 어떤 수단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가? 교회는 항상 어떤 진리 위에서만 굳게 설 수 있는가?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핍박으로 진리를 깨뜨려 버리고자 했던 자기의 노력이 실패로 끝난 것을 보고, 사단은 일찍이 로마교를 형성시켜 큰 배교를 일으켰던 타협적 방침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신교도는 아니지만 새겨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없이 이 세상 사물에 몰두된 자들과 연합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연합으로 옛 시대 보다 더욱 심한 해독을 끼치는 결과를 빚어내었고, 종교라는 가면 아래 교만과 사치를 마음대로 자랑하므로 교회들은 부패하여졌다. 사단은 계속하여 성경의 교리를 왜곡시켰고, 무수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한 유전들이 깊이 뿌리를 박게 하였다. 교회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투쟁하는 대신에 그 유전들을 지지하고 변호하였다. 그리하여 개혁자들이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세운 원칙들을 전락시켰다.”(쟁투, 298)


[상고할 말씀]

도피해 갈 때, 그들은 집과 재산과 생활 수단 등을 모두 버렸다. 그들은 언어와 관습이 전혀 다른 낯선 나라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새롭고 생소한 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밭을 가는 농부로 지내왔던 중년 남자들이 이제는 기계 공업을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을 달게 받아들이고 불평이나 게으름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극도의 빈궁에 빠진 때도 종종 있었으나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축복을 감사하고 끊임없는 영적 교제에서 기쁨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순례자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괘념치 않고 그들이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라로 눈을 돌림으로 마음을 평안하게 가졌다.’

망명과 고난 중에서도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주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필요를 따라 주님께서는 항상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다. 주님의 천사들은 그들의 곁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붙들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이 멀리 바다 저편에서 그들이 건설할 나라, 신교의 자유라는 귀중한 유업을 자손들에게 남겨 줄 땅을 가리켜 주시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길을 따라 전진하였다.”(쟁투, 290, 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