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위스에서의 개혁 운동

by 청지기 posted Jul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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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7시 55분


제2과


스위스에서의 개혁 운동


[연구범위]

각 시대의 대쟁투, 171~184


기억절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서론 :  로마 교도들은 그들의 상투 수단으로 교회의 권위와 관련에 의하여 호소하였으나 개혁자는 성경을 굳게 고수하였다. ‘우리 스위스에서는 헌법에 일치되지 않는 한 관습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성경이 우리의 헌법이다’라고 그[개혁파 사람]는 말하였다.

두 토론자의 대조적인 모습은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신중하고 온유한 태도로 순순히 말하는 개혁자의 분명하고 조용한 논조는 에크의 거만하고 시끄러운 억설에 혐오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었다.”(쟁투, 183, 184)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가 나타남

1. 하늘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교회의 지도자로 자격을 갖춘 큰 인물들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인물을 선택하는 데도 교회를 설립할 때와 똑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나 보인다. 하늘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위 있고 부요하고 백성의 지도자로 자격을 갖춘 그러한 큰 인물들을 사용하지 아니하셨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우월감 때문에 교만하고 자부심이 강하였으므로 자기 동포들에게 동정심을 나타내거나 겸손하신 나사렛 사람과 함께 협력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무식하고, 수고하기를 좋아하는 갈릴리의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는 부르심이 주어졌다. 그 제자들은 겸손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당시에 횡행하던 거짓 교훈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은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저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훈련 시킬 수 있으셨던 것이다. 그 사실은 위대한 종교 개혁 당시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도적 역할을 한 개혁자들은 비천한 가문의 출신들로서, 당시에 계급 의식에서 오는 교만과 미신적 감화와 성직자의 이기적 책략에서 오는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사람들이었다. 큰 공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비천한 인재를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러므로 영광은 사람들에게 돌릴 것이 아니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기쁘신 뜻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질 것이었다.”(쟁투, 171)

2. 츠빙글리(1484~1531)는 언제,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루터가 작센의 한 광부의 집에서 태어난 지 몇 주일 후에, 울리히 츠빙글리(Ulric Zwingli)가 알프스 산중에 있는 한 목자의 오막살이에서 출생하였다. 유년 시대의 츠빙글리의 환경과 교육은 그가 장래의 사명을 위하여 준비하는 데 매우 적당하였다. 그는 웅장하고, 아름답고, 숭엄(崇嚴)한 천연계의 품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과 위대하심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그의 고향인 산중에서 조상들이 성취한 업적과 용감한 행위에 대한 역사는 그의 젊은 욕망을 불타게 해주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독실히 믿는 그의 조모 곁에서 교회의 많은 전설과 고담(古談)에 간혹 나타나는 귀중한 성경 말씀을 들었다. 그는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부조들과 선지자들의 위대한 업적, 팔레스틴 산촌에서 양무리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야기한 것, 베들레헴의 아기, 갈바리의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쟁투, 171, 172)

츠빙글리의 종교 교육

3. 말틴 루터(1483~1546)와 마찬가지로 츠빙글리의 부친도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나 츠빙글리는 어떤 섭리에 의해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눅 18:21)


말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츠빙글리의 부친도 자식의 교육에 대하여 크게 유의한 나머지, 일찍부터 그를 고향에서 내어 보냈다. 츠빙글리의 지능은 너무 빨리 계발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적당한 교사를 발견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13세 때, 당시 스위스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가 있는 베른(Bern)으로 보내어졌다. 그런데 거기서 그의 전도유망한 앞길을 위협하는 위험한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승려들이 그를 승원으로 끌어들이고자 단호한 노력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러므로 그들은 기만과 아첨으로 츠빙글리를 그들의 승원으로 이끌어 들이고자 애를 썼다. 루터는 학생 시대에 수도원의 방에 파묻혀 있었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면, 그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츠빙글리에게 그와 똑같은 위험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의 아버지는 그 탁발승들의 계획을 먼저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아들이 게으르고 무가치한 승려의 생활을 살도록 허락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아들의 전도유망한 장래가 위태로운 것을 알고, 지체 말고 집으로 돌아오도록 지시하였다.”(쟁투, 172, 173)

4. 다시 도시에서 학업을 계속하게 된 츠빙글리는 자신에게 밝아오는 새벽의 첫 광선과 같은 어떤 진리를 스승에게서 배우게 되었는가?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그[츠빙글리]는 부친의 명령을 순종하였으나, 나이 어린 그에게 고향의 산골은 만족을 줄 수 없었다. 오래지 아니하여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바젤(Base1)로 갔다. 츠빙글리는 거기에서 비로소 값없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게 되었다. 고어학(古語學)의 교사이던 비템바하(Wittembach)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던 중 성경을 깨닫게 되고, 그의 문하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학생들의 심중에까지도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비추어 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자와 철학자가 가르친 이론보다 더욱 오래되고 무한히 위대한 가치를 가진 진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 오랜 진리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의 유일한 구속(救贖)이 된다는 진리였다. 이 진리는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밝아오는 새벽의 첫 광선과 같았다.”(쟁투, 173)

츠빙글리와 루터의 조화

5. 츠빙글리는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면서 무엇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성경 해석에 대하여 어떻게 주장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그[츠빙글리]는 신부로 서품을 받고, ‘그의 온 마음을 다하여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맡은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치는 데는 성경을 밝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동료 개혁자의 한 사람은 말하였다. 성경을 탐구하면 할수록 성경은 진리라는 것과, 로마교는 이단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났다. 마침내 그는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단 하나의 완전하고 오류 없는 표준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서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의 선입견이 되어 있는 이론이나 교리를 지지하는 설명의 도구로 삼지 아니하고 성경 자체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배울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의 의미를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하였다. 그는 성령께서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참뜻을 드러내 주신다고 말하였다.”(쟁투, 173)

6. 츠빙글리는 루터와 어떠한 글로도 서로 교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하였다. 츠빙글리는 이것이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화로 된 것임을 어떻게 역설하고 있는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츠빙글리가 전한 교리는 루터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그 스위스의 개혁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그는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가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사람들은 내가 인도한 사람보다 그 수효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어떠한 이름도 증거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분의 군사이며 오직 그분만이 나의 대장이시다. 나는 단 한 구절도 루터에게 써 보낸 일이 없었고, 루터 역시 나에게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 우리 두 사람이 한 번도 같이 의논한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리를 그처럼 일률적으로 말하게 된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닌가? 이 사실 자체는 성령의 조화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쟁투, 174)

순복음의 천명(闡明)

7. 츠빙글리의 활동이 처음에는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누가 그의 사업을 반대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츠빙글리가 가르친 죄사함의 교리를 무엇으로 대체했는가?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7)


처음에는 그의 활동이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반대가 일어났다. 승려들은 그의 사업을 방해하고 그의 교훈을 정죄하기로 작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조소와 비난으로 그를 공격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무례한 말과 협박으로 그를 대하였다.

하나님께서 무지와 미신의 속박을 깨뜨리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바로 그 때에, 사단은 사람들을 암흑 가운데 묻어 두고, 그들의 속박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하여 더욱 큰 힘으로 일하였다. 사람들이 여러 같지 아니한 곳에서 일어나서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와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을 때 로마교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에서 새로운 능력으로 거래소를 열고,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다.

모든 죄는 그 값이 정해져 있었으며, 교회의 금고만 채워진다면 사람들을 자유롭게 범죄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나는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다. 로마교는 죄를 인허해 줌으로 자기들의 재원(財源)이 늘어났고, 개혁자들은 죄를 견책하므로 그리스도를 속죄주와 구주로 지적하였다.”(쟁투, 177, 178)

8.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통해서 면죄부가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가? 뿐만 아니라, 츠빙글리를 통하여 무엇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는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1519년에 스위스의 전국을 휩쓴 큰 역병은 개혁 사업을 촉진(促進)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이러한 두려운 질병에 직면하게 되자, 그들은 얼마 전에 저들이 사 둔 면죄부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실제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확실한 신앙의 토대를 갈망하게 되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는 병에 걸려 거의 회복될 가망이 없을 만큼 위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츠빙글리는 희망과 용기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으며, 죄의 값을 완전히 갚아 주실 것을 신뢰하였다. 사경(死境)에서 회복되자 그는 전에 없던 열성으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말에는 비상한 능력이 있었다. 존경하는 목자가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회복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그들은 병자들을 간호하거나 죽은 자들의 곁에 서 있기도 하였으므로, 이전보다 복음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쟁투, 179, 180)

법왕당의 교활한 음모

9. 개혁 사업이 점점 승리를 얻어 가자, 법왕당은 이를 박멸하기 위하여 어떤 교활한 계책을 세웠는가?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8)


개혁 사업이 점점 승리를 얻어 감에 따라 법왕당은 이를 박멸하려고 더욱 결심을 굳게 하였다. 박해가 독일에서 진행되는 루터의 운동을 진압하는 데 별반 효과가 없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들은 개혁파의 무기를 가지고 개혁파를 대항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츠빙글리와 토론을 하기로 작정하고, 그 일을 주선함에 있어서도 토론할 장소뿐만 아니라 토론자들을 판정할 심판자들까지도 자기들 스스로 선택함으로 분명히 승리를 확증하고자 했다. 그들은 츠빙글리가 일단 그들의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기어이 놓치지 않겠다고 여러 가지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도자만 침묵시키면, 그 운동이 곧 탄압될 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목적은 조심스럽게 감추어졌다.”(쟁투, 181, 182)

10. 츠빙글리는 그 토론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떤 방법으로 회의장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으며, 교활한 원수와 싸울 수 있었는가?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츠빙글리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취리히의 의회는 법왕당의 계획을 의심하게 되었고, 또한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들에 대하여 법왕의 교구에서 화형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았으므로 그들의 목사를 이와 같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금하였다. …

비록 츠빙글리가 그곳에 출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위력은 회의석까지 미쳤다. 서기는 전부 법왕당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필기를 못하도록 금지되어서 이를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로 되었다. 그럴지라도 츠빙글리는 매일 바덴에서 어떠한 것이 토론되었는지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 토론장에 출석한 한 학생은 매일 저녁 그날에 있었던 토론에 관한 기록을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다시 다른 두 학생으로 말미암아 에콜람파디우스의 편지와 함께 날마다 취리히에 있는 츠빙글리에게 전달되었다. 동시에 츠빙글리는 거기에 대한 회답으로 적당한 조언(助言)과 권고를 보내었다. 그의 글은 밤에 기록되었는데, 연락하는 학생들은 그것을 가지고 이튿날 아침 바덴으로 돌아왔다. 도시의 문을 지키는 파수꾼을 피하기 위하여 그 심부름꾼들은 가금(家禽)을 넣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들어갔으므로 아무런 지장이 없이 잘 통과되었다.

츠빙글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교활한 대적과 싸울 수 있었다.”(쟁투, 182, 183)

토론의 결과로 개혁 사업이 강해짐

11. 이 토론에서 로마 교도들과 개혁자들은 어떤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로마 교도들은 그들의 상투 수단으로 교회의 권위와 관련에 의하여 호소하였으나 개혁자는 성경을 굳게 고수하였다. ‘우리 스위스에서는 헌법에 일치되지 않는 한 관습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성경이 우리의 헌법이다’라고 그[개혁파 사람]는 말하였다.

두 토론자의 대조적인 모습은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신중하고 온유한 태도로 순순히 말하는 개혁자의 분명하고 조용한 논조는 에크의 거만하고 시끄러운 억설에 혐오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었다.”(쟁투, 183, 184)

12. 그 토론은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 토론은 18일간 계속되었다. 그 토론이 마칠 때 법왕당은 그들이 승리한 것으로 확신하고 그 사실을 주장했다. 토론자들의 대부분은 로마 편이었다. 의회는 개혁파의 패배를 선언함과 동시에 개혁파의 무리는 그들의 지도자 츠빙글리와 함께 교회에서 끊어졌다고 포고하였다. 그러나 회의의 결과는 어느 편이 유리하였는지 보여 주었다. 그 토론의 결과로 개신교의 사업이 더욱 강해져서 미구에 베른과 바젤 두 주요한 도시가 개혁 사업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쟁투, 184)


[상고할 말씀]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죽었고, 타락과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원한 속량으로 우리를 사셨다. … 그분의 수난은 … 영원한 희생이요 … 또한 우리를 고쳐 주시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는 믿음으로 그분을 의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영원히 충족시켜 준다.’ …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신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하도록 강권하고 강요하는 열심이 있다.’”(쟁투, 180, 츠빙글리의 설교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