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음

by 청지기 posted Jun 2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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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7시 57분


제1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음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610-620; 마태복음 23장; 마가복음 12:41-44; 누가복음 20:45-47; 21:1-4 


기억절 :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


서론 :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목적은 관원들을 경고하는 것과 배우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을 교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더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었다. 유전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과 타락한 제사장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신앙을 통하여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다. 이 사슬들을 그리스도께서는 끊으셔야만 하였다.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바리새인들의 성격을 더욱더 충실히 폭로시켜야만 하였다.”(소망, 611-61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1. 예수님의 지상 봉사가 거의 마쳐 갈 즈음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백성들이 성전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매혹되었으나, 저들은 어떤 이유로 당혹스러워하며 놀랐는가?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1, 3)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마지막 날이었다. 예루살렘에 모인 큰 군중들은 그리스도를 주목하였다. 백성들은 성전 마당에 운집하여 진행 중에 있는 논쟁을 주목하면서 그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전에는 이와 같은 장면을 목격한 일이 전혀 없었다. 세상의 명예도 제왕의 휘장(徽章)도 가지지 않은 젊은 갈릴리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다. … 도전에 도전을 받으셨으나 그분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오류와는 대조되는 순결하고 빛나는 진리를 제시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지도자들 앞에 그들의 참된 형편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죄악적 행위를 계속해서 고집하면 분명히 형벌을 받을 것을 보이셨다. 경고는 충실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다른 일이 남아있었다. 성취되어야 할 다른 목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은 점점 증가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매혹되었으나 한편 크게 당혹하였다. 그들은 지식과 겉모양의 경건을 보고 제사장들과 랍비들을 존경하였다. 모든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제사장들과 랍비의 권위에 맹종하였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은 공격을 받을 때마다 덕행과 지식이 더욱 밝히 드러난 교사 예수님을 이 사람들이 불신임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비열한 얼굴에서 낭패와 혼란을 보았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이 매우 쉽고 단순한데도 불구하고 관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데 놀랐다.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가 어떤 노선을 취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큰 근심으로 저희가 항상 권면을 따르던 자들의 동정을 살펴보았다.”(소망, 611)

2.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행하실 마지막 일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분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성격에 대하여 더욱더 분명하고 충실하게 폭로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2, 4)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목적은 관원들을 경고하는 것과 배우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을 교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더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었다. 유전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과 타락한 제사장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신앙을 통하여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다. 이 사슬들을 그리스도께서는 끊으셔야만 하였다.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바리새인들의 성격을 더욱더 충실히 폭로시켜야만 하였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와 같은 거룩한 권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해석자요, 백성의 재판관으로서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극도의 순종과 복종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율법에 따라 가르치는 랍비의 교훈은 행할 것이나 랍비의 모본은 따르지 말라고 명하셨다. 랍비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바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과 반대되는 것을 많이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유전에 근거를 둔 많은 규칙들을 지키도록 명하고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했다. 그리고 율법의 어떤 부분을 저희 스스로는 남몰래 무시하면서 백성에게는 순종해야 된다고 설명하고 또 그들이 하고자 하는 목적을 정당화시키고자 할 때면 저희는 실제로 그 율법의 순종에서 면제되었다고 주장하였다.”(소망, 611-612)

경건함을 과시함 – 헛된 가장(假裝)

3.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경건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가장(假裝)했는가?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신 6:8)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5-7)


그들의[바리새인들] 경건함을 과시하는 것이 그들의 계속적인 목표였다. 이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지나치게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에 관하여 모세에게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신 6:8)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고 실행할 때에 모든 인류는 고상하게 될 것이다. 의롭고 자비롭게 거래함으로 그 손은 마치 도장처럼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들을 드러낼 것이다. 그들은 뇌물과 부패하고 기만적인 모든 일로부터 깨끗함을 유지할 것이다. 그들은 사랑과 동정의 사업에 있어서 적극적이 될 것이다. 고상한 목적으로 향한 눈들은 정결하고 진실할 것이다. 표정이 풍부한 얼굴과 생기 있는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분의 흠없는 품성을 증거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분간하지 못하였다. 모세에게 주어진 명령은 성경의 교훈을 몸에 부착해야 한다는 지시로 해석되었다. 이 명령은 양피지 조각에 기록되었으며 이마와 손목에 눈에 잘 뜨이는 방법으로 묶이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하여금 정신과 마음을 굳게 붙잡게 하지는 못했다. 이 양피지는 다만 주목을 끌기 위한 휘장으로 차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것들은 착용자들에게 백성들의 존경을 일으키도록 하는 헌신된 모습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헛된 가장(假裝)에 일침을 놓으셨다.”(소망, 612-613)

4. 또한 예수님께서는 랍비나 선생이라는 이름을 탐내는 허영심을 어떻게 책망하셨는가? 그분께서는 하늘로서 오신 선생이요, 영광의 왕으로서 참된 위대함을 어떻게 보여주셨는가?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10)


또한 예수께서는 랍비나 선생이라는 이름을 탐내는 허영심을 책망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칭호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관원들과 율법의 해석자들과 관리자들은 다 한 아버지의 자손인 형제들이다.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저희 양심과 신앙을 지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그 명예로운 칭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백성들의 마음에 새기셨다.”(소망, 613)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위대함이란 도덕적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라고 여러번 반복하여 가르치셨다. 하늘이 평가하는 품성의 위대함은 우리 동료들의 행복을 위하여 살고 사랑과 자비의 사업을 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영광의 왕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류의 종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성경을 곡해함으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은 그렇지 않았더면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지식 그리고 참된 성결에 긴요한 저 내적인, 거룩한 생명을 받아들였을 사람들의 심령을 눈멀게 하였다.”(소망, 613-614)

가난한 과부의 연보

5.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저들의 종교적 지위의 영향력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으며,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경건의 모양으로 포장된 위선을 어떻게 폭로하셨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나니 그런즉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마 23:14, 킹제임스)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저희는 이것을 그들 자신의 이익을 얻는 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경건한 과부들의 신임을 얻은 다음 과부들이 저희 재산을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인 것처럼 나타내었다. 과부들의 돈을 장악하게 되자 교활한 음모자들은 이 돈을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들은 부정직을 감추기 위하여 공중 앞에서 긴 기도를 드리고 경건한 모양을 크게 자랑하였다. 이 위선이 그들에게 더욱 큰 천벌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선언하셨다. 그와 같은 책망이 오늘날 경건하다고 크게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들의 생애가 이기심과 탐욕으로 더럽혀졌을지라도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순결한 것처럼 보이는 예복으로 가려서 한동안은 저희 동료들을 속인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모든 목적을 아시고 모든 사람을 저희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소망, 614)

6. 예수님께서는 예물의 남용과 예물을 드릴 의무는 별개의 문제임을 어떻게 주지시키셨는가? 그분께서는 실례로서 한 가난한 과부의 예물을 어떻게 평가하셨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12:43)


그리스도께서는 남용을 용서 없이 정죄하셨으나 또한 의무를 줄이지 않도록 주의하셨다. 그분은 과부의 예물을 강요하여 악용한 이기심을 책망하셨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창고에 그의 예물을 가져온 과부를 칭찬하셨다. 사람이 예물을 악용한다고 하여 그 바친 자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소망, 614)

“구주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과부의 가난함을 주목하도록 명하셨다. 그 때에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 여자의 귀에 들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자기의 행동이 이해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에 그 여자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가득 찼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적은 돈을 보관하여 자신을 위하여 쓰도록 충고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살찐 제사장들의 손에 넣어 주면 연보궤에 들어온 많은 값진 예물들 가운데서 그것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동기를 아셨다. 그 여자는 성전 봉사는 하나님의 명하신 것임을 믿었으며 성전을 유지하는 데 그의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 그 여자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였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그녀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기념비가 되고 영원히 그의 기쁨이 될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의 예물과 함께 바쳐졌다. 그 가치는 그 동전의 가치로서가 아니요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평가되었다.”(소망, 615)

율법의 더욱 중요한 일들, 곧 공의와 자비와 진리는 무시됨

7.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떤 죄들을 폭로하셨는가?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 23:16-19)

마 23:20-22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거짓되고 좁은 표준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를 해석하였다. 그들은 어떤 죄들은 가볍게 여기고 다른 죄는 거의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될 듯이 취급하면서 여러가지 죄의 등급을 만들어 독단적으로 까다로운 구별을 지었다. 그들은 돈을 고려하여 사람들의 맹세를 면제해 주었다. 때때로 그들은 많은 돈을 받고 한층 더 악한 죄들을 용서하여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다른 경우에는 사소한 과오에도 엄중한 형벌을 선언하였다.”(소망, 616)

8.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백성들에게 십일조 제도를 무거운 짐이 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로 더 중요한 어떤 진리들이 무시되고 있었는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마 23:23 인용)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는 신성한 의무에 대한 남용을 다시 정죄하신다. 의무 그 자체를 그리스도께서 제거하신 것은 아니다. 십일조 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으며 옛적부터 준수되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의 십일조를 지불하였다. 유대의 관원들은 십일조를 바칠 의무를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무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수행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독재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요구 조항이 아주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그들이 성취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의무를 언제 만족하게 성취할는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는 이 제도가 공정하고 합리적이었으나 제사장들과 랍비들이 이것을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은 중대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하나의 의무라고 인정하셨으나 이것이 다른 의무들을 등한히 할 핑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바리새인들은 박하(薄荷)와 회향(回香)과 근채(芹菜)와 같은 정원의 채소의 십일조를 바치는 데 매우 정확하였다. 이렇게 하는 데는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으로 정확하고 고결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무익한 제한은 백성들을 억눌렀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신성한 제도에 대한 존중심을 파괴하였다. 그들은 하찮은 구별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심령을 점령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긴요한 진리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율법의 더욱 중요한 일들 곧 공의와 자비와 진리는 무시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소망, 616-617)

외관적인 성결 속에 숨겨진 불의

9.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외적인 성결은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기 위한 거짓된 성결임을 어떤 비유로 폭로하셨는가? 죽은 자의 무덤을 장식하고 값비싼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어떤 죄와 같은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회칠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무덤이 그 속에 썩고 있는 유해(遺骸)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제사장들과 관원의 외관적인 성결 속에 불의가 감춰져 있었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대하여 미신적인 관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무덤을 장식하기 위하여 막대한 돈을 낭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였다. 죽은 자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나타냄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지도 않고 그들의 이웃을 그들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와 같은 우상숭배는 오늘날도 매우 성행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값비싼 기념비를 세우기 위하여 과부와 고아와 병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명하신 생애의 의무는 돌아보지 않는 반면에 이런 일을 위하여 시간과 돈과 노력을 아낌없이 허비한다.”(소망, 617-618)

10. 죽은 선지자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존경심은 왜 거짓된 것이었으며, 그들이 조상들의 죄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고백 또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스스로 나타냈는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정신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29-31)


죽은 선지자들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보이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열심은 있었으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유익을 얻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책망에 주의하지도 않았다. …

바리새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조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리지 않았으리라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취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이 진리의 빛으로부터 마음을 돌이키려고 기만하는 사단의 능력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들은 신앙의 연고로 순교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의 맹목적 소행에 대하여 의심한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즐거이 받아들였을 것이요 구주를 거절한 자들의 죄에 결코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극기와 겸손을 요구할 때에 그들은 확신을 짓눌러 없애고 순종을 거부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신 바리새인들이 행한 정신과 같은 정신을 나타낸다.”(소망, 618)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보내신 마지막 경고와 호소

11.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경고의 말씀을 주셨는가?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데 포함되는 자기들의 무서운 책임을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의로운 아벨이 가인의 손에 쓰러져 최초의 무죄한 피가 흘려진 때로부터 그 같은 역사는 죄악을 증가시키면서 반복되었다. 각 시대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전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서 왕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저희의 음성을 높였다. 대대로 빛과 진리를 거절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형벌은 축적되어 왔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이 형벌을 이제 저희 자신의 머리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죄악은 이전 어느 세대의 죄악보다도 더 컸다.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그들은 아벨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죽임을 당한 모든 의인의 피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저희의 죄악의 잔을 넘치도록 채우려고 하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 후에 공정한 보응으로 저희의 머리 위에 부어질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셨다.”(소망, 618-619)

12.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어떻게 호소하셨는가? 이 날에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운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는가? 오순절 이후에 이 사건은 어떻게 평가되었는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마 23:37)


예수께서 성전과 청중들에게 미련이 있는 듯한 시선을 던지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얼굴에는 거룩한 동정의 표가 나타났다. 마음의 깊은 고민과 쓰라린 눈물 때문에 목메인 음성으로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셨다. 이것은 이별의 몸부림이었다. 그리스도의 애통에서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신비한 이별이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저희 자신을 하나님과 절연(絶緣)하였다. 감람나무의 원가지들은 꺾여 나갔다. 마지막으로 성전 내부를 바라보신 예수께서는 비통하게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지금까지 그분은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성벽에서 나가실 때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영원히 떠날 것이었다. 그 때 이후로 성전의 의식은 무의미할 것이며 성전 봉사는 조롱거리가 될 것이었다.”(소망, 620)

“한편 각 나라에서 온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봉헌된 성전을 찾았다. 금과 보석으로 빛나는 그 성전은 아름답고 장엄하게 보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아름다운 궁전에 더이상 계시지 아니하셨다.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스스로 이혼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지상 봉사의 끝이 가까웠을 때에 마지막으로 성전의 장식을 바라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8). 지금까지 그분은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에서 나가시자,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건축된 성전에서 영원히 거두어졌다.”(행적, 145)


[상고할 말씀]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그 여자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자들은 그들의 풍부한 데서 바쳤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서 영광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드린 큰 예물은 그들의 안락이나 사치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또 아무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과부의 푼돈과는 그 가치에 있어서 비교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행동을 비열하다거나 혹은 높은 도덕적 가치를 가진 성질의 행동이라고 판정짓는 것은 그 행위의 동기이다.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찬양하는 큰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한 작은 의무와 남에게 보이지 않게 드린 적은 예물과 인간의 안목에는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이 흔히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귀한 것이 된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마음이 가장 값진 예물보다 하나님께는 더욱 귀중하다. 가난한 과부는 그가 드린 적은 예물을 드리기 위하여 그의 생활비를 바쳤다. 그는 사랑하는 사업에 이 두 푼을 드리기 위하여 자신의 음식을 희생하였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큰 필요를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이 일을 행하였다. 구주의 칭찬을 받은 것은 이 이기심 없는 정신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었다.”(소망, 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