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논쟁

by 청지기 posted Jun 17, 202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해지는 시간: 오후 7시 57분


제13과


논쟁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601-609; 마태복음 22:15-46; 마가복음 12:13-40; 누가복음 20:20-47


기억절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서론 :  이 서기관은 번제물과 제물보다 하나님께 더욱 받으실만한 의의 행위를 깨달았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의의 사업을 행할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 한 의식적인 희생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심지어 도덕적 율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율법에는 단지 권위적인 명령 이상의 더 깊은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해 나타내 보이셨다. 율법 가운데는 복음에 나타난 바와 같은 원칙이 구현되어 있다. 율법은 사람의 의무를 지적하며 사람의 죄를 보여 준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용서와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소망, 608)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1. 예수님의 책망을 논박할 수 없으므로, 잠잠히 듣고 있던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누구를 보내었으며, 어떤 문제를 가지고 왔는가? 그들의 계획은 어떻게 좌절되었는가?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눅 20:20-22)

눅 20:23-26


그들은 예수께서 가끔 만나신 일이 있는 바리새인들을 보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아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열심 있는 청년들을 보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심문할 때에 그분에 대하여 적대적인 증언을 하려고 하는 어떤 헤롯 당원들이 이 청년들과 동행하였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서로 큰 원수지간이지만,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로 연합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인들의 가혹한 과세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세금을 바치는 일은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된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에게 올무를 놓을 기회를 엿보았다. 정탐꾼들이 예수께 와서 겉으로는 신실한 체하며 그들의 의무를 알기를 원하는 것처럼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

정탐꾼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질문에 이쪽 혹은 저쪽이라고 직접 대답할 것을 기대하였다. 만일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로마의 관원에게 보고되어 반란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실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정당하다고 선언하셨을 경우에는 그분을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한다고 백성들에게 고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저희의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느꼈다. 그들의 계획들은 혼란하게 되었다. 요점(要點)을 간추려서 대답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질문이 대답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그들에게는 없었다.”(소망, 601-602)

2. 예수님께서는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들을 어떤 말씀으로 책망하셨는가?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눅 20:25)


그리스도의 대답은 회피적이 아니요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이었다. 가이사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진 로마의 돈을 그의 손에 드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로마의 권세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이상 그들은 이 권세를 유지하기에 요구되는 것 만큼 세금을 바칠 것이며, 이것이 더욱 높은 의무와 상충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하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국가의 율법에 온화하게 복종하는 반면에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먼저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구주의 말씀은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들에게 한 혹독한 책망이었다.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충실히 실행하였더라면 그들의 국가가 분열되고 외국의 권세에 복종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깃발이 예루살렘에 휘날리지 않았을 것이며 로마인의 보초병이 저희의 문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요 로마의 총독이 저희의 성안에서 다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대 민족은 그 당시 하나님을 배반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소망, 60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리적인 논쟁

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는 교리적인 차이로 인한 어떤 논쟁이 종종 일어났는가?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행 23:7-8)


바리새인들이 잠잠하자 곧 사두개인들이 교활한 질문을 가지고 나왔다. 두 교파는 서로 크게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하게 유전(遺傳)을 고수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외형적 의식에 엄격하였고 씻고 금식하고 긴 기도를 드리는 데 부지런하였으며 구제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유전과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헛되게 한다고 선언하셨다. 한 계층으로써 그들은 완강하고 위선적이었지만 그러나 저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가 된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의 대부분을 믿으며, 이것을 행위의 법칙으로 삼는다고 공언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자들이며 유물론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교리와 또 그 보상과 형벌을 부인하였다. 이 모든 점에 있어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았다. 부활은 특별히 이 두 교파 사이의 논쟁의 주제였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굳게 믿고 있었으나 이 논의에 있어서 미래의 상태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혼란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사두개인들의 논증에 맞설 수 없는 그들의 무능함은 계속적인 분개심을 일으켰다. 두 교파 사이의 논의는 대체로 성난 언쟁을 초래했으며 그들을 전보다 더 멀어지게 하였다.

수효에 있어서는 사두개인들이 그들의 상대측보다 훨씬 적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굳게 장악할 수 없었으나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부자였으므로 그들은 부가 제공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계층에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제사장은 흔히 그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들의 회의적 견해를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명백한 약정 하에 그렇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수효가 많고 인망이 있는 까닭에, 사두개인들은 어떤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때에라도 외형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의 교리를 용인할 필요가 있었으나 그와 같은 직분에 택함을 입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사실이 그들의 오류들에 큰 영향력을 주었던 것이다.”(소망, 603-604)

4. 사두개인들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했는가?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부인하며 인간의 품성은 어떻게 순결하게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마 22:23)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거절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한 정신, 즉 그와 같이 자신을 나타낸다고 그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한 정신으로 활기를 얻으셨다. 또한 하나님과 내세에 관한 그분의 가르치심은 그들의 교리에 반대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류보다 높으신 유일의 존재자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하시는 섭리와 하나님의 예지는 인류에게서 자유로운 도덕적 작용을 빼앗아 사람으로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류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더욱 큰 세력으로부터 독립하게 하여 스스로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 그들의 믿는 바였다. 그들은 인류가 스스로의 생애를 지배하고 세상의 사건들을 계획할 자유가 있으며 인류의 운명은 사람 자신의 손에 놓여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의 힘과 자연의 법칙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능력을 적당하게 활용함으로 인류는 향상될 수 있고 계발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엄격한 강요를 통하여 그의 생애가 순결하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소망, 604)

사두개인의 신조의 오류를 바로잡으심

5. 사두개인들의 신앙에는 그들의 품성을 예수님과 같은 품성으로 꼴 짓기에 불가능한 어떤 과오가 있었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어떤 교활한 질문을 가지고 왔는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막 12:18-20, 23)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개념이 그들 자신의 품성을 꼴 지었다. … 예수께서는 사람의 현세적 유익과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마음을 움직이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품성의 변화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루려는 그들의 과오를 보여 주셨다.

이 가르침을 사두개인들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님과 논쟁함에 있어서 그들은 그분을 정죄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평판을 떨어뜨릴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부활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기로 선택한 문제였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동의하신다면 그분은 바리새인들을 더욱 크게 화나게 할 것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반대하신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조롱하기로 그들은 계획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만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처럼 불멸의 상태에서도 동일한 물질의 미분자(微分子)로 구성되었다면 죽음에서 살아났을 때에도 살과 피가 있어야 하며 지상에서 중단된 생명이 영원한 세계에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추론하였다. 그럴 경우 세상에서의 관계가 계속될 것이며 남편과 아내는 다시 연합되어 부부 생활이 계속되고 모든 일이 죽기 전과 똑같이 되어 나가고 금생의 부정(不貞)과 정욕이 내세에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심으로 예수께서는 내세를 가리운 베일을 거두셨다. 예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두개인들의 믿는 바가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셨다. 그들의 전제는 잘못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고 부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것처럼 위선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지만, 신조의 오류에 대하여 그들을 책망하셨다.”(소망, 604-605)

6. 사두개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가장 굳게 고수한다고 자랑해 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진리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4-27)


사두개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가장 굳게 고수한다고 자랑해 왔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 말씀의 참뜻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 지식은 성령의 비추임으로 마음에 깊이 확신되어야 한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그들의 무지가 그들의 믿음의 혼란과 심령의 어두움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예수께서는 선언하셨다. 그들은 그들의 유한한 추리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해를 넓게 하고 힘있게 할 이 거룩한 진리에 저희 심령을 열도록 그들을 초청하셨다. 그들의 유한한 지력으로써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능력의 경이로운 현시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이와 같은 능력의 증거를 거절하며 이것을 그들이 아직도 조금밖에 이해할 수 없는 자연 작용에 돌린다. 우리 주위에 있는 신비를 여는 유일의 열쇠는 그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임재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물을 명하시고 집행하시는 우주의 창조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넓은 견해와 그분의 섭리의 신비를 그들이 알 필요가 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저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성경이 쓸데 없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는 청중들에게 선언하셨다. …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간주하신다. 그분은 시작부터 끝을 아시며 그분의 사업의 결과를 그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처럼 보신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맨 마지막에 죽을 성도에 이르기까지 죽은 고귀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와 불사불멸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부활한 성도들은 친밀하고 부드러운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의 목적 가운데 예기되어 있는 이 형편을 그분은 이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보신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에게는 산 자이다.”(소망, 605-606)

서기관의 깨달음과 확신

7. 사두개인들은 이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책잡고 정죄하기 위해 어떤 학식 있는 서기관을 설득하여 예수님께 보내었으며 그분께 무엇을 질문하게 했는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바리새인들은 창조주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지적한 첫 네 계명을 그의 이웃 사람에게 대한 사람의 의무로 밝힌 나머지 여섯 계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높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실제적 경건을 실천하는 데 크게 실패하였다. 예수께서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큰 결점을 보이신 다음에 그 열매로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선한 행실의 필요를 가르치셨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나머지 여섯 계명을 처음 네 계명 이상으로 높인다는 비난을 받으셨다. …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큰 계명으로 요약된다. 나머지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른 계명 가운데 포함된다. 이 두 계명이 다 사랑의 원칙의 표현이다. 둘째 계명을 범하면서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첫째 부분을 범하면서 둘째 부분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보좌에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때에 우리 이웃에게도 바른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만 우리 이웃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다.

모든 계명이 사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어 있으므로 한 계명을 범하면 이 원칙을 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 우리 주님은 처음 네 계명이나 나머지 여섯 계명을 다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로 나타내시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소망, 606-607)

8. 질문한 서기관은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으며, 어떤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서기관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는가?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2-33)


그리스도의 지혜로운 대답은 서기관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였다. 서기관은 유대인의 종교가 내적 경건보다는 외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죄를 속하는 데 있어서 단순한 제의(祭儀)적인 제물과 신앙심 없는 피흘림이 무가치하다는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람에게 이기심 없이 대하는 것이 이 모든 의식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이론의 올바름을 고백하여 백성들 앞에서 그의 결정적이며 신속한 대답을 한 이 사람의 신속성에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이 나타났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사장들의 눈살 찌푸림과 관원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대히 그의 마음의 확신을 말한 이 정직한 서기관을 동정하였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셨다.

이 서기관은 번제물과 제물보다 하나님께 더욱 받으실만한 의의 행위를 깨달았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의의 사업을 행할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 한 의식적인 희생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심지어 도덕적 율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율법에는 단지 권위적인 명령 이상의 더 깊은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해 나타내 보이셨다. 율법 가운데는 복음에 나타난 바와 같은 원칙이 구현되어 있다. 율법은 사람의 의무를 지적하며 사람의 죄를 보여 준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용서와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소망, 608)

“다윗의 자손”, 메시야에게 예언된 칭호

9.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해 모여든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질문을 하셨으며, 그들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무엇을 깨닫지 못했는가?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마 22:41-42)


예수께서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가까이 모여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질문하셨다. 이 질문은 메시야에 관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하여, 뉘 자손이냐 즉 그들이 그분을 단순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흑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무리들은 음성을 합하여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메시야에게 예언된 칭호였다. 예수께서 능력 있는 기적들로 당신의 신성을 나타내셨을 때에, 그분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을 때에 백성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뇨’하고 그들 가운데서 서로 물었다.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도움을 청하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라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분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라는 즐거운 부르짖음의 만세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날 성전에서는 어린이들이 그 즐거운 찬송을 반향시켰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소망, 608-609)

10.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은 원수들로 하여금 어떻게 영원히 침묵하도록 만들었는가?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3-46)


인간이 보기에 그리스도는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성 가운데는 거룩한 품성이 화신(化身)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 속성들…곧 그의 권능, 그의 지혜, 그의 선량함, 그의 순결함, 그의 진실함, 그의 영성(靈性), 그의 자비하심 등을 그의 아들에게 부여하셨다. 비록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완전함의 모든 품성과 거룩함의 모든 탁월함이 거하였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라는 그의 제자의 요구에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4:8, 9, 10, 30)고 대답할 수 있었다. …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혹하게 비난한 것은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요 10:33)는 이유 때문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은 그를 돌로 치고자 애썼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 관한 사람들의 가상적인 추측에 대하여 핑계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송사자들에게 ‘너희는 오해하였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인성을 쓰신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모든 선지자 중 가장 겸손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품성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그들은 좀 더 단순해지고 좀 더 겸손해질 것이라는 진리를 그의 생애로써 본을 보이셨다. 그는 사람들이 거룩한 성정(性情)에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써 그들이 그들의 인성으로써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모본을 주시었다.”(그리스도를 알려 하여, 111)


[상고할 말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생명의 말씀을 말씀하실 때 백성들은 그분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심지어 제사장들과 법관들까지라도 그분을 믿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나라의 지도적 인물들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책잡고 부인하기로 결심하였다. 비록 그들이 주님께 대하여 죄를 찾아내고자 노력하였으나 헛된 수고만 하였고 주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편견 속에 넣어 두었고 그들은 그분의 제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분께서 메시야 되시는 가장 분명한 증거를 거부하였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 사람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온 사람들이었으며 백성들은 그들의 권세에 아무 이의 없이 굴복해 왔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법관들과 학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그분이 그리스도이면 이 경건한 사람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와 같은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주를 거절하게 되었다.

그 제사장들과 법관들에게 작용한 그 정신은 지금도 매우 경건한 것으로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여전히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위한 특별한 진리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연구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속한 사람의 수가 많은 것, 재산이 풍부한 것, 인기가 있는 것을 지적하고 진리를 옹호하는 자들을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믿음을 가진 소수의 가난하고 인기없는 자들이라 하여 멸시한다.”(쟁투, 595-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