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사로야 나오라”(2)

by 청지기 posted Apr 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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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7시 13분


제4과


“나사로야 나오라”(2)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529-536; 요한복음 11:18-44


기억절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서론 :  ‘돌을 옮겨 놓으라’ 그리스도께서는 돌을 명하여 옮겨지게 할 수 있었으며 돌은 그리스도의 음성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곁에 가까이에 있는 천사들을 명하여 이 일을 하실 수 있었다. 그의 명령을 듣고 보이지 않는 손이 돌을 옮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돌은 인간의 손으로 옮겨져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이 신성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셨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신성의 능력이 소집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움없이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주어진 능력과 역량을 사용할 때에 그에게 힘을 주시고 그와 협력하신다.”(소망, 535)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1.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르다와 마리아의 요청대로 베다니로 오셨으나 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조용히 기별만 보내셨는가?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요 11:18-20)


베다니로 여행하시는 도중에 예수께서는 여느 때처럼 병들고 곤궁한 자들에게 봉사하셨다. 마을에 도착하자 그는 사자를 보내어 그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누이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곧 집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길가의 조용한 곳에 머물러 계셨다. 친구나 친척이 죽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행하는 큰 허례허식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하는 바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고용된 애곡자들의 통곡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런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그 누이들을 만나고 싶지 않으셨다. 통곡하는 친구들 가운데는 가족의 친척들과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가장 큰 원수들도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의도를 아셨으므로 즉시 자신을 알리지는 않으셨다.”(소망, 529)

2.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일찍 오시지 않음으로 인한 깊은 비통함이 있었으나 어떤 희망으로 무엇을 아뢰었는가?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마르다는 예수를 영접하고자 서둘렀으나 그의 마음은 엇갈리는 감정들 때문에 흔들리었다. 예수의 얼굴 표정에서 그는 항상 나타내시던 똑같은 친절과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예수께 대한 마르다의 신뢰심은 깨어지지 않았으나 그는 예수께서 또한 사랑하셨던 자기의 극진히 사랑하던 오빠를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일찍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가슴에 깊은 비통함이 있었으나 이제라도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리라는 희망으로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애곡자들 때문에 떠들썩한 가운데 이 누이들은 여러 번 이 말을 되풀이하였다.

인간적인 동정과 신적인 동정으로 예수께서는 슬픔에 가득 차고 근심으로 여윈 마르다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마르다는 지난 일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려 하지 않고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란 비애에 가득 찬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하였다.”(소망, 529-530)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3.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믿음을 격려하시면서 어떤 진리에 대하여 그녀의 믿음을 확증하시고자 하셨는가?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2-24)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믿음을 격려하시면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대답은 즉시 변화된다는 희망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생각을 그의 오라비의 현재의 부활을 넘어서 의인의 부활로 이끄셨다. 이 일로 그는 마르다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죽은 의인의 부활에 대한 보증과 구주의 능력이 이를 이루시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대답하였다.”(소망, 530)

4.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부활에 대한 마르다의 신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시고 완전케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로서의 본질적 사명을 어떻게 선포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마르다의 신앙에 참된 방향을 주시려고 더욱 노력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2)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는 자에게 영생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재림의 때를 내다보신다. 그때 죽은 의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겠고 살아남은 의인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곧 행하시려는 이적은 죽은 모든 의인의 부활을 대표한 것이다. 그의 말씀과 행하신 일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의 창시자이심을 선언하셨다. 미구에 몸소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는 사망의 열쇠를 잡으시고 무덤의 정복자로 서셔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그의 권리와 능력을 주장하실 분이었다.

‘네가 믿느냐’는 구주의 말씀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마르다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믿음과 그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다는 자기의 신념을 고백하였다.”(소망, 530)

가식의 슬픔과 참 동정의 눈물

5.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따라 나온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가식적으로 슬퍼하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느끼셨는가?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요 11:31, 33)


기별을 듣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방에서 나왔다.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가는 줄 알고 조문객들은 그를 따라갔다. …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예수께서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으셨다. 그는 슬픔을 표명하는 것처럼 행하던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는 지금 짐짓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무리 중에 얼마는 멀지 않아 능력 있는 이적을 행하시는 분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림을 받을 자도 죽일 계획을 세울 것을 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꾸며낸 슬픔의 옷을 그들에게 벗길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의분을 참으셨다. 모두가 사실인 말씀을 그는 하실 수 있었지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당신을 참으로 믿은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있기 때문이었다.”(소망, 530-533)

6.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흘리신 눈물에는 깊은 동정과 함께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는가?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3-35)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예수께서 물으실 때에 그들은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함께 무덤으로 나아갔다. 슬픈 장면들이었다. 크게 사랑을 받아온 나사로의 친구였던 이들이 그의 누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데 그의 누이들은 그를 위하여 가슴이 찢어지듯이 울었다. 이 인간의 고통, 그리고 이 세상의 구주께서 곁에 서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당한 친구들이 죽은 자에 대하여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시고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는 인성을 쓰셨으며 따라서 인간의 슬픔에 감응되셨다. 그의 부드럽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언제나 고통받는 자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는 우는 자와 같이 우시고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신다.”(소망, 533)

인간의 슬픔을 넘어선 하늘의 눈물

7.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나사로와 그의 가족을 위한 눈물이기보다는 누구를 위한 슬픔이 더 크셨는가? 장차 자신을 팔아넘기고 죽음에 내어 줄 유대인들의 운명을 어떻게 내다보셨는가?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0, 22-24)


그러나 예수께서 우신 것은 다만 마리아와 마르다를 동정하는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예수의 눈물에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인간적인 슬픔보다 더 높은 슬픔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위하여 울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그를 무덤에서 곧 불러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나사로를 위하여 슬피 울고 있는 자들 중의 여러 사람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당신을 죽일 계획을 곧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신 것이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눈물을 올바르게 해석하기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었는가! 그의 슬픔의 원인에 대하여 그의 앞에 나타난 장면의 외부적인 사정밖에는 알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소곤소곤 말하면서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의 씨를 떨어뜨릴 기회를 엿보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비웃었다. 만일 나사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다면 왜 그는 그때에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 두셨는가?

예언적 안목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증오심을 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하여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아셨다. 그는 지금 겉으로 매우 동정하는 듯이 보이는 자들이 얼마 안 있어 희망의 문과 하나님의 도성의 문을 스스로 닫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한 새로운 장면이 일어나려고 하였는데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될 것이요 그때에는 아무도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다가올 징벌이 예수 앞에 분명하게 그려졌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포위당하는 것을 보셨다. 그는 지금 나사로를 위하여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도성이 포위될 때에 죽게 될 것이며, 저희의 죽음에는 희망이 없을 것을 아셨다.”(소망, 533-534)

8. 그분께서 흘리신 눈물에는 나사로와 그의 가족을 위한 인간적인 동정의 슬픔 이외에도 또 다른 높은 차원의 어떤 슬픔의 의미가 담겨 있었는가?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요 11:38)


그리스도께서 우신 것은 그의 앞에 전개되는 장면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거운 각 시대의 모든 슬픔의 짐이 그의 위에 놓여졌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법의 무서운 결과를 보셨다. 예수께서는 아벨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세상 역사에는 선과 악의 투쟁이 간단없이 계속되어 왔음을 보셨다. 미래를 내려다 보실 때에 그는 고통과 슬픔, 눈물과 죽음이 사람들의 운명임을 보셨다. 각 시대와 각 나라에 사는 인간 가족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죄 많은 인간의 재난은 예수의 심령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가 그들의 모든 고통을 덜어 주시려고 하실 때에 그의 눈물의 샘이 터졌던 것이다.”(소망, 534)

“돌을 옮겨 놓으라”

9.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마르다는 어떻게 오해했으며, 왜 거절했는가? 그러나 이 명령은 왜 꼭 순종해야만 하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나사로는 바위 동굴 속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그 출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다. 예수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시체를 단지 한 번 보시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장사한 지가 나흘이나 지나 시체가 벌써 썩기 시작했다는 말로써 거절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시기 전에 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원수들로 하여금 기만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지난번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기이하게 나타난 데 대하여 거짓된 소문을 퍼뜨렸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 5:39)고 말씀하셨었다. 그녀는 다만 잠깐 동안만 앓았으며 죽었다가 곧 살아났으므로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녀가 다만 잔다고 하신 것처럼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선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칠 수 없으며 그의 이적에는 부정 행위가 있었던 것처럼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주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려고 하실 때에 사단은 어떤 사람들을 움직여서 반대하게 한다. ‘돌을 옮겨 놓으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가능한 한 내가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여라. 그러나 마르다의 적극적이며 지기 싫어하는 성질은 그 주장을 고집하였다. 마르다는 썩고 있는 시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빨리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마르다의 신앙은 그분의 약속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소망, 534-535)

10. 예수님께서는 돌에게 직접 명하시거나 천사들에게 명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손에 의해 옮겨지도록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요 11:40)

막 11:23; 눅 17:6


그리스도는 마르다를 책망하셨지만 그러나 그의 말씀은 아주 부드러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왜 그대는 나의 권능을 의심하는가? 왜 나의 요구를 반대하여 이론을 붙이는가? 그대는 내 말을 이미 들었다. 만일 그대가 믿으면 그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자연의 이치대로의 불가능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다. 회의와 불신은 겸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참된 겸손이며 참된 자기 포기이다.

‘돌을 옮겨 놓으라’ 그리스도께서는 돌을 명하여 옮겨지게 할 수 있었으며 돌은 그리스도의 음성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곁에 가까이에 있는 천사들을 명하여 이 일을 하실 수 있었다. 그의 명령을 듣고 보이지 않는 손이 돌을 옮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돌은 인간의 손으로 옮겨져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이 신성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셨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신성의 능력이 소집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움없이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주어진 능력과 역량을 사용할 때에 그에게 힘을 주시고 그와 협력하신다.”(소망, 535)

"나사로야 나오라" ― "깨어라 깨어라 깨어라"

11. 명령에 순종하여 돌이 옮겨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어떤 기도를 올리셨는가? 이 기도는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과 더불어 그분의 어떤 신분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인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요 11:41-4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행하신 모든 일에서 당신의 아버지와 협력하셨다. 언제나 그는 홀로 일하지 않으셨으며 이적을 행하신 것이 믿음과 기도로써 이루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시려고 매우 주의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관계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장이 기만이 아니었음을 보게 될 것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다. 맑고 드높은 예수의 음성이 죽은 자의 귀를 울렸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신성은 인성을 통하여 번쩍거렸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 얼굴에서 백성들은 예수의 능력의 확실함을 알 수 있었다. 모든 눈은 동굴의 입구로 쏠렸고 모든 귀는 가장 작은 소리라도 들으려고 기울여졌다. 열렬하고도 근심스러운 호기심으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실증하던지 혹은 희망을 영원히 잃게 할 증거, 즉 그의 신성에 대한 한 시험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소망, 536)

12. 어떤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는가? 예수님의 음성을 통하여 혈기 왕성한 건강한 사람의 활력으로 일어난 나사로의 모습은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 펼쳐질 어떤 놀라운 사건을 예시하고 있는가?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42, 52)


고요한 무덤 속에서 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죽었던 자가 무덤의 문 곁에 섰다. 그의 동작은 그에게 입혀진 수의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서 보고 있는 자들에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시 인간의 일꾼이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나사로는 자유롭게 되어 병으로 쇠약해진 사람처럼 연약하고 비틀거리는 다리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혈기 왕성한 건강한 사람의 활력으로 무리들 앞에 섰다. 그의 눈은 총명과 구주에 대한 사랑으로 빛났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처음엔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장면이 벌어졌다. 누이들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저희 오라비의 생명을 도로 찾게 되자 기쁨의 눈물에 목메인 음성으로 구주께 감사를 표시하였다. 오라비와 누이들과 친구들이 재회를 기뻐하고 있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 장소에서 떠나셨다. 그들이 생명을 주신 분을 찾았을 때에 그분은 이미 거기 계시지 아니하셨다.”(소망, 536)

“예수께서 불꽃에 싸여 구름을 타고 강림하실 때에 그분의 은나팔이 울려 퍼졌다. 그분은 잠자는 성도들의 무덤을 바라보시고 당신의 눈과 손을 하늘로 향하여 드시면서 ‘깨어라! 깨어라! 깨어라! 티끌에 잠자는 자들아! 일어나라!’고 외치셨다. 이어서 굉장한 지진이 일어나더니 무덤이 열리면서 죽었던 자들이 썩지 않을 몸으로 일어났다. 144,000명이 사망으로 인하여 갈라져 있었던 저희 친구들을 알아보고 큰소리로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그와 동시에 우리도 변화되어 주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들과 같이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갔다.”(초기, 16)


[상고할 말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유대인의 역사를 보아 우리는 이 말씀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이적이면서도 가장 큰 이적은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다. 유대인들은 구주의 신성에 대한 이러한 매우 놀라운 증거를 보았으나 저희는 그것을 배척하였다. 나사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나 그들에게 그 사실을 증거했으나 그들은 이 모든 증거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나사로를 죽이려고까지 했다(요 12:9-11).”(실물, 265)

“땅이 흔들리고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 소리가 요란한 중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자는 성도들을 불러일으킨다. 주님께서는 의인들의 무덤을 보시고 당신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드시고, ‘깨어라, 깨어라, 깨어라,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여, 일어나라!’고 외치신다. 이 땅의 어느 곳에서나 죽은 자들이 그 음성을 듣게 될 것이며,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날 것이다. 이때에 온 세상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중에서 부활한 큰 무리로 소음(騷音)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사망의 감옥에서 나와 불멸의 영광을 입고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고 외친다. 그리고 산 의인들과 부활한 성도들은 음성을 합하여 오랫동안 승리의 즐거운 함성을 올릴 것이다.”(쟁투, 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