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선한 사마리아 사람

by 청지기 posted Mar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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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6시 41분


제11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497-505; 실물교훈, 376-389; 누가복음 10:25-37


기억절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19-21)


서론 :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율법사가 더욱 분명하고 더욱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실물, 378)


자문자답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율법사

1.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율법사는 그분을 시험하기 위하여 어떤 질문을 했으며, 주님께서는 어떻게 답하셨는가? 랍비들이 예수님을 정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5-27)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다. 큰 무리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율법사로 하여금 이 질문을 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논쟁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는 질문자 자신에게 답변을 요구하셨다. 그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경시한다고 여전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 문제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돌리셨다.

율법사는 바리새인의 지위와 사업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경 말씀의 참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연구해 왔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그의 답변에서 그는 많은 예식과 의식에 대한 교훈을 그냥 지나쳤다. 율법사는 예식과 의식의 무가치함을 주장했으며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두 가지의 큰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께 칭찬받은 이 대답은 구주를 랍비들보다 유리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율법의 한 해설자가 말한 것을 승인한 데 대해 예수를 정죄할 수 없었다.”(소망, 497-498)

2. 율법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이 범법자임을 깨닫게 되었는가? 그는 죄를 뉘우치는 대신 변명하려고 어떤 질문을 던졌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 10:28-29)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거룩한 통일체로 나타내셨으며 이 교훈에서 한 계명은 지키면서 다른 계명을 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그 까닭은 같은 원칙이 모든 계명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은 모든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일은 일상 생애에서 실천되어야 할 원칙이다.

율법사는 자기 자신이 범법자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심령의 살피는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달았다. 율법사는 자신이 깨닫고 있다고 주장한 율법의 의를 실행하지 않았다. 율법사는 동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않았다. 회개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는 대신에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율법사는 진리를 인정하는 대신에 계명을 이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이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죄를 뉘우치는 일을 슬그머니 회피하고 백성들의 눈앞에서 자신을 변명하려고 희망하였다. 구주의 말씀은 율법사의 질문이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율법사 자신이 자기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란 질문을 던졌다.”(소망, 498)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질문은 유대인들에게 끝없는 논쟁을 일으켰다. 예수님께서는 논쟁 가운데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어떤 실제적인 비유를 사용하셨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이 질문은 유대인들에게 끝없는 논쟁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외인이요 원수들이었다. 그러나 자국민들과 상이한 사회의 계층 사이에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가? 제사장과 랍비와 장로는 누구를 이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를 순결하게 하려고 끊임없는 예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무식하고 부주의한 군중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될 터인바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그들은 ‘부정한 자’들을 이웃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또다시 논쟁 가운데 휩쓸려 들어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자들의 편협함을 공공연히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순한 이야기로써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율법사로 하여금 진리를 고백하게 한 천래(天來)의 사랑이 넘쳐흐르는 장면을 청중들에게 묘사하셨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방법은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류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자아에 중심을 둔 마음의 결함과 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0-32)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상상적인 장면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었으며 표현된 그대로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를 보고 다른 쪽으로 지나쳐 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무리 가운데 있었다.”(소망, 498-499)

4. 강도에게 상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로 누구를 만나게 되었는가? 제사장과 랍비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1-32)


하늘의 천사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그들을 압박과 고통에서 건져내는데 사람들과 협력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상처를 입고 고통하는 자가 누워 있는 길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비와 도움이 필요한 그를 볼 수 있게 하셨다. 온 하늘은 그들의 마음이 인간의 고통을 동정할 것인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

욥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고 말했다. 사람으로 변장한 두 천사가 소돔에 왔을 때에 롯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면서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욥 31:32; 창 19:2)라고 말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모든 교훈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 교훈을 실생활에 실천하지 않았다. 민족적 편견이 강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이 되었다.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가 자국민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가 아마도 사마리아인일거라고 생각하고 돌아가 버렸다.”(소망, 500)

사마리아인의 선행

5. 사마리아인은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인 제사장과 랍비와는 다르게 어떤 선행을 베풀었는가?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도중에 고통당하는 자가 있는 그곳에 이르렀다. 그를 보자 그는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 낯선 사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문제시하지 않았다. 만약 유대인이라면, 그리고 그 상황이 정반대의 경우라면, 그 사람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멸시하면서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사마리아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지체하면 자신도 폭행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도 생각지 않았다. 도움이 요구되고 고통을 당하는 한 인간이 그의 앞에 있는 것만이 문제였다. 사마리아인은 옷을 벗어서 그를 덮어 주었다. 그가 여행하기 위하여 준비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하고 그의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짐승에 태운 다음 부상당한 사람이 흔들려서 더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주막으로 데리고 와서 밤을 지새우며 그를 친절히 돌봐 주었다. 아침에 환자가 좀 나은 것을 보고 사마리아인은 그의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그 비용을 지불하고 그를 위하여 돈을 맡겼다. 이것으로도 만족지 않아 그는 더 많이 비용이 들 경우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주리라’라고 약속하였다.”(소망, 503)

6. 이 실례(實例)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임을 분명히 보여주셨는가?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눅 10:36-37)


율법사는 심지어 지금도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여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라는 질문은 영원한 답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단순히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의 구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대적에게 상처받아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소망, 503)

구주의 사명과 선한 사마리아인

7.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구속의 경륜을 어떻게 설명해주고 있는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욥 33:2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사명을 묘사하셨다. 인류는 사단에게 속임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도둑맞고 파멸되어 멸망당하도록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우리의 절망적인 상태를 동정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는 죽어가는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의 처지를 떠맡으셨다. 그는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의의 두루마기로 우리를 덮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여시고 자신의 비용으로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준비를 이루셨다. 그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자신의 모본을 지적해 보이시면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7, 13:34).”(소망, 503-504)

8. 이 이야기를 통해서 율법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이었는가? 또한 이 교훈이 오늘날 더욱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

계 3:14-20


예수에게 물은 법관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됩니까? 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의의 대의임을 아시고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인은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의 명령을 이행함으로 자신이 율법을 행하는 자임을 입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셨다. 말만을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대되고 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이 교훈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당시보다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 이기심과 냉정한 형식주의는 사랑의 불길을 거의 꺼버렸으며 품성을 향기롭게 할 은혜를 쫓아버렸다.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대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정 내에서, 이웃 간에,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남의 유익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자아를 희생하지 않는 한, 우리가 무엇을 공언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소망, 504)

“근래에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찾기 위하여 주위를 살펴보았을 때 내 마음은 심히 괴로웠다.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기다린다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조류를 따라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갈채 받기를 훨씬 더 열렬히 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갓 떠나온 이름뿐인 교회들처럼 냉랭하고 형식적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기별의 말씀은 그들의 현재의 형편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계 3:14-20을 보라). 저들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고 그저 ‘미지근’하다. 저들이 ‘신실하고 참된 증인’의 권고를 듣고 열심을 내어 회개하지 않으며, ‘불로 연단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지 않으면 그들을 토하여 내치실 것이다.”(초기, 107)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이나 죄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통하여 영혼 구원사업에 있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 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관심을 인간의 관심과 연결시키시고 우리에게 인간을 구원하는 사업에 그와 하나가 되라고 요청하신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모든 악한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죄이지만, 죄인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다. 과오를 범하고 수치심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격려의 말에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잘못과 과오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거의 절망 직전까지 내몰린다. 우리는 이런 영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도움이 가장 필요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가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병으로 인한 것이든 죄로 인한 것이든 곤경에 빠진 인간들을 볼 때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결코 말하지 말 것이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 믿음과 기도로써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라. 상처 받은 사람에게 치료하는 향유가 될 수 있는 믿음과 용기의 말을 하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큰 투쟁에서 용기를 잃고 낙담해 왔다. 그러나 이때 한마디의 친절한 격려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들은 승리할 힘을 얻었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하는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그 위로를 나누어 주려고 노력함 없이 결코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소망, 504-505)

10.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율법의 원칙이 무엇임을 예증해주고 있는가?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는 왜 율법을 범하는 자인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이 모든 것은 율법의 원칙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 예증되고 예수의 생애에서 명백하게 나타난 원칙의 성취에 불과하다. 예수의 품성은 율법의 참 의미를 드러내며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친절과 사랑을 나타낼 때에 그들 역시 하늘 법도의 성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 19:7) 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존중히 한다고 공언하는 법을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정신이 곧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정신이 어떠한지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에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20, 12).”(소망, 505)


[상고할 말씀]

그 사마리아 사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자기를 업신여기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입은 사람을 자기 형제처럼 대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인간의 사랑이 필적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을 때에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은 우리를 피해 지나가지 않으셨으며 우리로 속절없이, 아무 소망도 없이 죽도록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온 하늘 천군의 존경을 받으시던 거룩하고 행복한 하늘 집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보시고 이를 고치시려고 인류의 상징을 당신 자신의 일처럼 돌아보셨다. 그분은 당신의 원수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그분은 당신을 죽인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모본을 가르키시며 제자들에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요 15: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다.”(실물, 381-382)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심령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사람 속에 심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 거하시는 것이며 곧 살아 움직이는 원칙을 말한다. 이 신앙은 품성 속에 나타나 선한 일을 하도록 해주는 그리스도의 덕성인 것이다. 복음의 원칙들은 실생활의 어떤 부문과도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과 활동은 그분의 생애를 대표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경건의 기초이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순진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러한 정신을 가질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자아가 그리스도께 몰입될 때에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계속해서 일어날 때 곧 하늘의 햇빛이 마음에 충만하고 얼굴에 나타날 때에 이루어진다.”(실물, 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