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2)

by 청지기 posted Mar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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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2)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489-496; 누가복음 10:17-24


기억절 :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서론 :  우리가 진리를 더욱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유지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허영과 교만으로부터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영혼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속에 좌정하시도록 해야 한다. 속죄를 깨닫는 데 있어서 인간의 과학은 너무나 유한하다. 구속의 경륜은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원대하다. 이것은 가장 깊은 추리로써도 궁구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구원의 과학은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는 자만이 구주의 귀중함을 분별할 수 있다.”(소망, 494-495)


참된 증인의 두드림

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고 거의 설복되었지만, 그리스도의 편에 계수함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매우 신중한 체하면서 랍비들은 이 새로운 선생이 가르치는 새 교리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백성들에게 경고하였었다. 그 까닭은 그의 이론과 행습들이 조상들의 가르침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에 제사장들과 관원들을 존경하였으며 그들 자신의 유전을 지키려고 진리를 거역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고 거의 설복되었지만 저희가 깨달은 대로 행하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의 편에 계수함을 받지 못하였다. 사단은 빛이 어두움처럼 보일 때까지 그의 유혹을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진리를 거절하였다.”(소망, 489)

2. 참된 증인은 어떤 방법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가? 심판 때에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될 것인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참된 증인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혹은 그의 사자를 통하여 주어진 모든 경고와 책망과 탄원은 마음의 문에서 두드리고 있는 두드림이다. 들어가기를 간청하는 음성은 예수의 음성이다. 두드릴 때마다 그것에 유의하지 않는다면 열려는 마음은 점점 더 약해진다. 오늘 무시당했다면 성령의 감화는 내일은 오늘처럼 강력하지는 못할 것이다. 심령의 감수성은 점점 둔하여져서 인생의 짧음과 내세의 위대한 영원을 잊어버리는 무서운 무감각에 빠지게 된다. 심판 때에 우리가 정죄받게 되는 것은 오류 가운데 빠져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요 무엇이 진리임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늘에서 주신 기회를 등한히 한 사실 때문일 것이다.”(소망, 489-490)

“심판의 때에 사람들은 그들이 거짓말을 양심적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를 등한히 하였기 때문에 정죄를 받을 것이다.”(부조, 55)

사단을 정복당한 원수로서 바라봄

3. 칠십인들이 기쁨으로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자, 주님께서 어떻게 답하셨는가?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7-18)


칠십인들도 사도들처럼 저희의 사명의 증거로서 초자연적인 권능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끝나자 기쁨으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대답하셨다.

과거와 미래의 광경이 예수의 마음에 떠올랐다. 예수께서는 하늘 처소에서 처음으로 쫓겨 내려오는 루스벨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기만자의 정체가 온 세계들 앞에 폭로되게 될 당신의 고민의 장면을 내다보셨다. 그는 사단이 선동하려는 참소와 기만과 허식의 위험이 하늘에서 영원히 없어지고 잃어버린 인류의 구속이 영원히 확실하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부르짖음을 들으셨다.”(소망, 490)

4.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승리하신 후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사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갈바리의 십자가와 그 고통과 수치 저 너머에서 예수께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그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매우 오랫동안 훼손되었던 이 땅에서 마침내 멸망 당하게 될 그 큰 최후의 날을 내다보셨다. 예수께서는 죄악의 일은 영원히 끝나고 하늘과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을 보셨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사단을 정복당한 원수로서 바라볼 것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승리를 얻으실 것이었으며, 그는 이 승리를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소망, 490)

예수의 능력과 사랑을 높이라

5.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합한 동역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우리는 사단의 능력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을 높이는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전능하신 성령의 권능은 죄를 참회하는 모든 영혼의 방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그의 보호하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원수의 권세 아래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구주께서는 시험받아 연단된 그의 자녀들 곁에 계신다. 실패와 손실과 불가능과 패배 같은 것들은 예수와 같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를 통하여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유혹과 시련이 닥쳐 올 때에 모든 어려움을 바로 잡으려고 기다리지 말고 그대를 도와주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사단의 능력에 대하여 너무 많이 생각하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저희 원수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에 관하여 기도하고 말함으로써 원수는 그들의 상상에 점점 더 크게 보인다. 사단이 강력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악한 자를 추방시키신 능력 있는 구주가 계신다. 사단은 우리가 그의 힘을 과장할 때 기뻐한다. 왜 예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왜 예수의 능력과 사랑을 높이지 않는가?”(소망, 490-493)

6. 하늘 높은 보좌를 둘러 있는 언약의 무지개는 무엇을 우리에게 보증하는가? 우리의 기쁨은 귀신들이 우리에게 항복하는 그 자체보다 무엇에 그 동기가 기초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하늘 높은 보좌를 둘러 있는 언약의 무지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사실에 대한 영원한 증거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와 더불어 투쟁하고 있는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우주에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보좌 자체가 존속되는 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한 보증이다.

예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대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말라. 자만에 빠져 그대의 주님의 정신과 힘으로 일하는 대신에 그대 자신의 힘으로 일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기심은 일에 성공이 어느 정도라도 따르면 명성을 높이려고 한다. 이기심은 아첨하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은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말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타고나지 않은 어떤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배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강력하게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느끼는 것만큼 행동의 동기를 그처럼 깊게 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접촉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동료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 그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됨을 기뻐하라. 그대가 자신보다도 더 높이 쳐다볼 때에 그대는 인간의 연약함을 끊임없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기심을 적게 가지면 가질수록 그대의 구주의 탁월하심을 더욱 명확하게 그리고 더욱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 자신을 빛과 힘의 근원에 더욱 가까이 연결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큰 빛이 그대에게 비추일 것이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더욱 큰 힘이 그대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온 하늘 가족과 하나가 됨을 기뻐하라.”(소망, 493)

진리를 더욱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

7.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모든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선지자들이 기록한 영적 진리를 기록자 자신들보다 더욱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소위 위대하고 현명하다고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자랑하는 모든 지혜로써도 그리스도의 품성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외모로, 인간으로서 그에게 닥쳐온 굴욕으로 그를 판단하였다. 그러나 어부들과 세리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모든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차츰 제자들이 저희 자신을 성령의 감화에 굴복시킬 때에 그들의 심령은 계몽되었다. 제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저희 가운데 계시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께서는 이 지식을 슬기롭고 총명한 자들은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계시되어진 것에 대해 기뻐하셨다. 가끔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말씀을 소개하시고 이 말씀이 자기와 자기의 속죄 사업에 적용되는 것을 보여 주셨을 때 제자들은 성령의 깨우치심을 받고 천국의 분위기 가운데 들어갔다. 제자들은 선지자들이 기록한 영적 진리를 기록자 자신들보다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그 후에 제자들이 구약 성경을 읽었을 때에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교리나 이미 죽은 현인들의 어록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로 대하였다. ‘세상이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다’(요 14:17)고 한 예수를 제자들은 바라보았다.”(소망, 494)

8. 우리가 진리를 더욱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페래아 사람들이 유대인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우리가 진리를 더욱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유지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허영과 교만으로부터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영혼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속에 좌정하시도록 해야 한다. 속죄를 깨닫는 데 있어서 인간의 과학은 너무나 유한하다. 구속의 경륜은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원대하다. 이것은 가장 깊은 추리로써도 궁구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구원의 과학은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는 자만이 구주의 귀중함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천천히 가시면서 가르치신 공과에는 유익한 교훈이 가득 차 있었다. 백성들은 예수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페래아 사람들은 갈릴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에 있어서보다 유대인의 완고함에 눌려 있지 않았으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저희 마음에 받아들였다.”(소망, 494-495)

누가복음에 기록된 비유들

9. 예수님께서는 봉사사업의 마지막 수개월 동안에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비유를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4-35)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 78:2)

바리새인과 세리 - 눅 18:9-14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 – 눅 13:6-9

큰 잔치 – 눅 14:16-24

성가시게 구는 과부 – 눅 18:1-8

친구가 밤중에 빵을 달라고 함 – 눅 11:5-10


그의 봉사사업의 이 마지막 수개월 동안에 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면서 계속하여 더욱더 괴롭혔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시는 말씀을 상징으로 가리우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바로 알 수 있었지만, 그의 말씀으로 그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거만한 기도는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1, 13)라는 참회하는 탄원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위선을 견책하셨다.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의 상징과 큰 잔치의 비유로써 그는 회개하지 않는 민족에게 이르게 될 운명을 예언하셨다. 복음 잔치의 초청을 경멸하는 태도로 거절한 자들은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경고의 말씀을 들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은 매우 귀중하였다. 성가시게 구는 과부와 친구가 밤중에 빵을 달라고 하는 비유는 예수의 다음 말씀에 새로운 설득력을 부여하였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때때로 그들의 흔들리던 믿음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7, 8)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회상하고 힘을 얻었다.”(소망, 495)

10. 그 비유들 중에서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비유는 제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되새겨주었는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2-34)

잃어버린 양 – 눅 15:3-7

잃어버린 은전 - 눅 15:8-10

탕자 - 눅 15:11-32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양에 관한 아름다운 비유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잃어버린 은전과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잃은 양에 관한 교훈을 더욱 확대시키셨다. 제자들은 이 교훈의 요점을 그 당시에는 충분히 깨달을 수 없었지만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 이방인들의 수확과 질투심 많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볼 때에 탕자의 교훈을 더욱 잘 깨달았으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24)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나아가 비난과 빈곤과 핍박을 당할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여행에서 하신 명령을 마음 가운데 되새기면서 용기를 얻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2-34).”(소망, 495-496)


[상고할 말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위하여 돌아가신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떠나가고 시험에 넘어질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속량물로 바친 그 사람을 결코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눈을 뜬다면, 압박에 눌리고 슬픔의 짐을 진 사람들이 마치 짐 더미 아래 있는 마차처럼 깔려서 낙망 가운데 죽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험을 당하여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천사들이 빨리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들 영혼들을 포위하고 있는 악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영혼들을 인도하여 확실한 기초 위에 발을 디디도록 해준다. 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세상의 군대들이 싸우는 것처럼 실제적이며, 그 영적 투쟁의 결과에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1, 32)라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가 홀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요 3:16).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와 대결하는 싸움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고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가운데 생활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결코 놓지 않을 손으로 그대를 굳게 붙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이해하고 믿으라. 그리하면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은 사단의 모든 기만과 공격에 대해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된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보훈, 118-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