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함정 가운데서

by 청지기 posted Jan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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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5시 59분


제5과


함정 가운데서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455-462; 요한복음 7:16-36, 40-53; 8:1-11


기억절 :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서론 :  과오를 범한 자들이 타락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고 그들에게서 눈을 돌이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고 그들을 재판하여 처벌하는 데 열중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 사람들보다 더욱 죄가 많은 수가 있다. 사람들은 죄는 사랑하면서도 죄인은 미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난하는 데는 느리고 회개함을 분별하여 용서와 격려를 하는 데는 신속하고 방황하는 자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여 그의 발이 그 길에 머무르도록 한다.”(소망, 462)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뇨

1. 절기에 참석하신 첫날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으셨으며(“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는 의문은 예수님께서 회당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가 가르칠 권리와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분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의 역사에 대하여 그들에게 어떻게 공개하셨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6-17)


예수께서 절기에 참석하신 첫날에 율법사들은 그에게 찾아가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냐고 힐문하였다. 그들은 관심을 예수로부터 그의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문제로, 그렇게 하여 자신들의 중대성과 권능에 관심이 돌려지기를 바랐다.

… 예수께서는 이 트집쟁이들의 질문을 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구원에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공개하셨다. 예수께서는 진리에 대한 지각과 인식은 지성보다는 마음에 더 의존한다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심령에 받아들이는 바 되어야 하며 의지의 충성을 요구한다. 만약 진리가 오로지 이성에만 제시될 수 있다면 자만심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마음에서의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모든 죄악을 버리는데 달려 있다. 아무리 큰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가 마음문을 열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의 원칙에 반대되는 모든 습관과 행동을 양심적으로 벗어버리지 않는 한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음이 밝혀질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정직한 마음으로 그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진리는 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자와 자신만을 위하여 말하는 자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저희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의 편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알려고 힘쓴 것이 아니라 진리를 피할 수 있는 어떤 핑계만을 찾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바로 저희가 그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임을 보이셨다.”(소망, 455-456)

2.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교사로서의 참 자격에 대하여 어떤 시금석을 말씀하셨는가? 그분의 가르침은 어떤 권위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지금 그는 참 선생과 기만자를 구별할 수 있는 한 시금석을 주셨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단지 자신만을 위하여 말한다. 이기주의적 정신은 그 본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진리의 교사로서 그가 가진 권위의 증거였다.”(소망, 456)

사단의 교묘한 시험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의 증거로서 랍비들의 어떤 마음을 드러내셨는가?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본심을 교묘하게 숨기려고 어떻게 말했는가?

…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요 7:19-20)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음을 보이심으로 당신이 신성을 가지셨다는 증거를 랍비들에게 보여주셨다. 베데스다에서 병 고치심을 본 이후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해 왔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수호하고 있다고 공언하는 율법을 스스로 범하고 있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빠른 섬광처럼 이 말은 랍비들에게 그들이 뛰어 들어가려고 하던 멸망의 구덩이를 나타내 보였다. 잠시 동안 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무한한 능력자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경고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인 계획은 은폐되어야만 했다. 예수의 질문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외쳤다.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사업은 악령에 의해 교사(敎唆)된 것이라고 교묘하게 말하였다.”(소망, 456)

4.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교묘한 말 돌리기에 휘말리는 대신 그들의 기만을 어떻게 완전히 폭로하셨는가? 이런 대화를 통해서 많은 백성들은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요 7:21-22)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묘한 말에 유의하지 않으셨다. 그는 계속하여 베데스다에서 병 고친 일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일치하며 유대인들의 율법 해석으로도 정당한 일임을 보이셨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할례를 주느니라’고 말씀하셨다. … 정한 날이 안식일에 해당되어도 예식을 행하여야만 하였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함이 율법의 정신에 얼마나 더 일치되는 일인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경고하셨다.

관원들은 잠잠하였으나 많은 백성들은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라고 부르짖었다.”(소망, 456-457)

그릇된 관념은 확실한 증거조차도 의심케 함

5. 예루살렘 거민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에 짓눌려서 랍비들의 교묘한 말에는 속지 않았으나, 무엇이 그들을 의심의 길로 들어서게 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요 7:27)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예수를 대적하는 관원들의 음모를 잘 아는 예수의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그에게 이끌려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그들을 짓눌렀다. 그러나 사단은 곧 의심을 불어 넣었다. 메시야와 그의 임하심에 대한 그들 자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준비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나 얼마 후 그가 사라질 것이며 그가 두 번째 나타날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메시야는 인성과는 아무런 생래적(生來的) 관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메시야의 영광에 대한 일반 백성의 관념이 나사렛 예수에게는 들어맞지 않은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는 암시에 유의하게 되었다.”(소망, 457)

6. 백성들이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자신들의 그릇된 생각으로 인한 무지의 결과임을 어떻게 드러내셨는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요 7:28-29)


그들이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원이 어디임을 안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그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애하였다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을 것이다.”(소망, 457)

스스로 연구하지 않으면 분별할 수 없음

7.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한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잘못 인도되었으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유대인들이 예언의 말씀과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깨달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 6:39-40)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한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거짓된 이론으로 말미암아 잘못 인도되었다. 이 선생들은 메시야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는 예언과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신다’는 예언을 힘있게 강조하고 그것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사 24:23; 시 72:8). 그러고는 저들은 이곳에 묘사된 영광과 예수의 비천한 모습을 멸시하는 태도로 비교하였다. 바로 그 예언의 말씀들은 오류를 옳다고 인정할 만큼 왜곡되었다. 백성들이 성실하게 그 말씀을 스스로 연구하였더라면 그들은 잘못 인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사야 61장은 그리스도께서 그가 하신 바로 그 일을 행하실 것이었음을 증거했다. 53장은 세상에 오셔서 거절당하시고 고통당하실 것을 나타냈으며, 59장은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품성을 묘사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저희 불신을 버리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들 앞에는 빛과 어둠, 그리고 진리와 오류가 있다. 어느 쪽을 받아들일지는 그들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인간의 마음은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시적 충동으로 결정하지 않고 성경절들을 조심성 있게 대조해 보고 그 증거의 무게에 따라 결정하도록 계획하신다. 만일 유대인들이 선입관을 버리고 기록된 예언의 말씀과 예수님의 생애를 특징짓는 사실들을 비교해 보았다면 그들은 비천한 갈릴리 사람의 생애와 봉사에서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조화를 깨달았을 것이다.”(소망, 458)

8.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처럼 어떻게 속임을 당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 15:13-1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처럼 속임을 당하고 있다.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유전의 빛으로 성경을 읽으며 백성들은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판단을 버리고 자신의 영혼을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맡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빛을 퍼뜨리기 위하여 정하신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의 가르침을 성경 말씀으로 시험해야 한다. 누구든지 순종할 수 있도록 진리를 알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적인 조명(照明)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소망, 458-459)

“진리의 기별을 듣는 자들 가운데 ‘이것이 진리인가?’ 하고 묻는 사람은 드물지만 ‘누가 이것을 옹호하는가’ 하고 묻는 사람들은 많다. 대중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수효로 진리를 평가한다. 그리고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들 중에 믿는 자가 있느냐’란 질문이 아직도 계속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시대처럼 오늘날도 진정한 경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며 영원한 부를 등한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과 종교적 지도자들까지라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진리에 대한 반대 논증은 되지 않는다.”(소망, 459-460)

예수님을 잡으려는 계획이 저지됨

9.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은 백성들이 기성 지도자들로부터 떠나 예수께로 이끌리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어떤 방책을 강구하기로 했는가? 그러나 그 회의는 어떻게 누구에 의해 저지되었는가?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요 7:43-53)


다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를 잡으려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만일 그를 마음대로 하도록 더 버려둔다면 그는 기성 지도자들에게서 백성을 이끌어 갈 것이므로, 제일 안전한 방책은 지체 없이 그를 침묵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의논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그들의 의논은 갑자기 저지되었다. ‘우리의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결정하느냐’고 니고데모가 질문하였다. 회중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니고데모의 말은 그들의 양심을 찔렀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정죄할 수 없었다. 거만한 관원들이 정의를 위하여 담대히 말한 그를 바로 보고 침묵을 지킨 것은 이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의 성품에서 감화를 받고 그를 변호하는 말을 한 것에 대해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놀랜 마음을 가다듬고 신랄하게 비꼬면서 니고데모에게 말하였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그 항의는 회의의 진행을 멈출 수밖에 없게 하였다. 관원들은 듣는 일이 없이는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예수를 정죄할 수 없었다. 그때에 모든 일은 좌절되어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었다.”(소망, 460)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계속하셨는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요 8:2)


도시의 흥분과 혼란, 열망하는 군중들과 반역적인 랍비들을 피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있는 조용한 감람산으로 가셨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 그는 성전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주위에 백성들이 모여들자 그는 앉아서 가르치셨다.”(소망, 460)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1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하여 율법에 대한 어떤 교묘한 음모를 꾸몄는가? 그러나 정작 그 함정은 예수님이 아닌 자신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있음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3-5)


그들의 꾸며낸 존경에는 그를 해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짜놓은 음모가 가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실지라도 그를 고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정죄할 구실을 확보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예수께서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면 그는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며,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 선언한다면 그는 로마인들만이 가진 권리를 횡령한다고 로마인에게 고소당할 것이었다.

… 소위 정의의 수호자들이라는 이들이 예수를 해할 함정을 만들기 위하여 이 여인을 죄짓게 했던 것이다. …

율법을 존중한다는 그들의 모든 공언에도 불구하고 랍비들은 여인을 고소하기 위하여 데려옴으로 율법의 규정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고소할 의무는 남편에게 있었으며 범죄한 상대방도 똑같이 처벌을 받아야 하였다. 고소자들의 행동은 완전히 월권이었다.”(소망, 460-461)

12. 예수님께서는 공의와 자비를 어떻게 조화시킴으로써 고발자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셨는가? 이 일을 통해서 당신의 어떤 성품을 보여주셨으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6-11)


예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제거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로마의 권위도 침해하지 않으셨다. 고발자들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제 거룩함을 가장하던 그들의 의복은 찢겨진 채 그들은 무한히 순결하신 분 앞에서 정죄를 받고 서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의 숨은 죄악이 무리들 앞에 공개될까 봐 두려워 떨면서 머리를 숙이고 눈을 땅에 떨어뜨린 채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희생자와 동정하시는 구주를 남겨두고 슬금슬금 도망쳐 버렸다. …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아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는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 무죄하신 분은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과오를 범한 자들이 타락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에게서 눈을 돌이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고 그들을 재판하여 처벌하는 데 열중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 사람들보다 더욱 죄가 많은 수가 있다. 사람들은 죄는 사랑하면서도 죄인은 미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난하는 데는 느리고 회개함을 분별하여 용서와 격려를 하는 데는 신속하고 방황하는 자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여 그의 발이 그 길에 머무르도록 한다.”(소망, 461-462)


[상고할 말씀]

편견을 내세워 지성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이들은 신령한 깨우침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견해가 제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진리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는가? 라고 묻지 않고, 누가 이것을 옹호하는가? 라고 물으며, 그들을 즐겁게 하는 그 통로를 통해서 오지 않는 한,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토록 철저히 자기 자신의 사상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배우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성경의 증거를 조사하려고 하지 않으며,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거절하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그분께서 역사하실 때가 종종 있다. 그분께서는 그분 스스로 선택하신 도구들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반면에 빛의 통로가 될 것으로 여겨졌던 인물들을 지나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진가에 의해서,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목사, 105-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