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갈릴리에서의 위기(2)

by 청지기 posted Nov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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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5시 14분


제10과


갈릴리에서의 위기(2)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388-394; 요 6:48-71


기억절 :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7-68)


서론 :  예수께서 하신 많은 말씀과 행동은 유한한 인간의 생각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는 우리를 위한 구속사업에 있어서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모든 언행은 그에 따르는 결과를 미리 생각하시고 행하여진 것이었다. 우리가 만일, 그분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중요하며 완전하고 그의 사명과 일치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방법은 이해할 수 없으나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든 행동의 기저(基底)가 되는 그의 크신 사상을 식별할 수는 있다. 예수께 가까이 나가는 생애를 사는 자는 많은 경건의 오묘를 깨달을 것이다. 그는 품성을 시험하여 그 마음의 목적을 밝히 드러내는 바 그 책망을 주시는 자비를 깨달을 것이다.”(소망, 393-39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만나보다 더 완전한 음식, 곧 영생에 이르는 떡을 주시기 위해 만나의 이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이적을 베푸실 것이었는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 6:48-50)

마 12:39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가리키면서 마치 그 양식의 공급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오셔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에 비교해 볼 때에 그 선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 주셨다. 만나는 세상에서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뿐 사망의 접근을 방지하거나 죽지 아니함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늘의 떡은 영생에 이르도록 영혼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것이다. 구주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상징의 말씀에 다른 또 하나의 상징을 첨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죽으심으로써만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으셨다. 다음 말씀에서 그는 자기의 죽음을 구원의 방편으로 지적하셨다. 그는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소망, 388)

2.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셨을 때, 랍비들은 왜 이해할 수 없었는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1-52)


랍비들은 성을 내면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부르짖었다. 그들은 마치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라고 물었을 때 그리하였던 것처럼,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체하였다. 그들은 어느 정도 예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였으나, 그것을 기꺼이 시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의 말씀을 곡해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께 대하여 편견을 품게 되기를 원하였다.”(소망, 389)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뜻은 그분을 하늘이 보내신 교사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분을 믿는 것이 영적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 말씀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결코 주리거나 목마르는 일이 없고, 그보다 고상하고, 보다 훌륭한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원고 81, 1906).”(화잇주석, 요 6: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상징적인 표현인 “생명의 떡”에 대하여 어떤 직설적인 표현으로 반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분의 살과 피를 우리의 음식으로 취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줄 것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상징적인 표현을 누그러뜨리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더 강력한 말로 그 진리를 반복하셨다. [요 6:53-55 인용]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거기서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양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영향을 끼치셔야만 한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또는 그것이 우리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의 사랑과 그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소화되어야 한다.”(소망, 389)

4.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 수 있으며, 이것이 같은 속성으로 하나 되는 비결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5-57)


그러나 이런 상징도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갖는 특권을 나타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내어 맡기셨으므로 그의 생애에는 아버지께서만 나타나셨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를 에워싼 악에 의해 더럽힘을 받지 않으시고 세상을 사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겨야 한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가? 그렇다면 영적 생애에 관하여 쓰여진 모든 기록은 그대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며 이 모든 것은 그대 자신을 예수께 연합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열성은 시들어지고 그대의 처음 사랑은 식어가는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을 다시 받아들여라.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라. 그리하면 그대는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가 될 것이다.”(소망, 389-390)

“그리스도는 그 말씀의 뜻을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한 그분의 언급은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굳게 붙잡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다.(원고 33, 1911).”(화잇주석, 요 6:53-57)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5.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 이해할 수 없었는가? 예수님께서 표적을 통하여 어떻게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는가?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58-60)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불신하는 유대인들은 구주의 말씀 가운데서 문자적인 의미 이외의 다른 뜻은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의문의 율법상 피를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성을 모독하는 말로 해석하고 저희끼리 이에 대해서 논란하였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제자들까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말하였다.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시면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의 말씀 가운데 있다.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시고 사귀를 내어 쫓으신 것은 그의 말씀으로 하신 것이었으며,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증언하였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교사들을 통하여 옛적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셨다. 온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며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말씀 위에 고정시키기를 원하셨다. 육체로 계신 예수께서 물러가실 때 그 말씀은 그들의 능력의 원천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의 주와 같이 그들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마 4:4)었다.”(소망, 390)

6. 예수님께서는 영적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는가? 예수님의 사상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음식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그리고 사람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한다. 자양분을 위하여 스스로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 말씀을 우리 각자를 위하여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의 지식을 중개로 하여서만 말씀을 얻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깊은 주의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 우리는 한 구절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구절 가운데 넣어 주신 사상을 확인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 사상이 우리의 것이 되어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알 때까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경험은 나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기도와 허락, 교훈과 경고는 나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이 진리의 원칙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시킬 때에 그 원칙은 자신의 일부가 되고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심령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상을 형성하고 품성을 발달시킨다.”(소망, 390-391)

그리스도(말씀)를 바라봄(먹음)으로 그분의 품성(생명)에 참여함

7.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봄으로 그분의 말씀을 먹을 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이루어 줄 것인가?

젖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나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나니, 이는 그가 아기이기 때문이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 말씀을 사용함으로 감각들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이라.”(히 5:13-14, 킹제임스)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항상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리고 목마른 백성들에게 가장 귀중한 계시를 나타내실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주이심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 때에 그들은 그 말씀이 영이요 생명임을 발견할 것이다. 이 말씀은 본성적이며 땅에 속한 성정을 멸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준다. 성령께서는 보혜사로 심령에 임하신다.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제자 안에서 재창조되고 제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사랑이 증오를 대신하고 마음은 신령한 모습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는 것이다.”(소망, 391)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생명의 떡을 먹고, 구원의 물을 마실 때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날 것이다. 그들의 품성은 마음이 먹고 마시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하는 모든 봉사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되며 사람이 높임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는다(편지 64, 1900).”(화잇주석, 요 6:53-57)

8.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는 자들은 어떻게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영광에도 참여할 것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과의 관계에 관한 신성하고도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는 당신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품성을 아셨으며 그의 말씀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교훈을 믿을 것이요, 또한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는 다 그의 품성에 참여하여 그의 품성과 일치하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저희가 품은 야심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예수께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하는 온유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요구를 받았다. 만일 저희가 생명의 선물과 하늘의 영광을 받아 누리려고 한다면 저희는 갈보리의 사람 예수가 걸어가신 좁은 길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소망, 391)

시험하는 진리 - 흔들림과 분리

9. 백성들은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를 통하여 어떻게 시험을 받았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진리가 제시될 때, 분리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0, 66)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


그 시험은 너무나 컸다.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던 자들의 열정은 식어갔다. 그들은 회당에서 하신 이 설교가 저희의 눈을 뜨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솔직한 고백이요 또한 그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다 하여도 지상의 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이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자아 희생의 생애에 동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묘한 영적 왕국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전에 예수를 찾았던 성실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갈망하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 만일 당신의 권능과 세력을 로마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는데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었다.”(소망, 391)

“제자들은 불신에 대한 공적인 책망을 받음으로 한층 더 예수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심히 불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주를 상심하게 하고 바리새인들의 악의를 만족시키기를 바라면서 예수를 등지고 멸시하면서 떠나갔다. 그들은 결정하였다. 곧 정신이 없는 형식, 알맹이 없는 껍질을 취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결정은 그 후 다시는 번복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와 더 이상 같이 다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칭찬과 아첨은 저희 귀를 즐겁게 할 것이나 진리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를 들을 수 없다. 군중이 따르고 무리들을 먹여 주고 또 개선의 함성이 들릴 때에는 그들의 음성이 찬양으로 우렁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살피심이 죄를 드러내고 그들에게 그 죄에서 떠나라고 명령할 때, 그들은 진리에 등을 돌리고 예수와 더 이상 동행하지 않는다.”(소망, 392)

10.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했을 때,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이켰으며, 어떤 정신의 지배를 받았는가? 그들은 어떤 소문을 퍼트렸으며, 그분께서는 이제 갈릴리에서도 유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위태롭게 되었는가?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요 6:6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이런 불만을 품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섰을 때에 한 다른 정신이 그들을 지배하였다. 한때는 그토록 흥미를 느꼈던 예수에게서 그들은 아무런 매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원수들을 찾아냈으니 이는 저희가 그 원수들의 정신과 사업에 일치하였던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그릇 해석하고 그 진술을 위증(僞證)하며 그 동기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대적할 수 있는 재료는 무엇이나 다 수집함으로써 저희의 행동을 지지하였다. 이런 거짓 소문으로 말미암아 분노가 크게 격발되었으므로, 예수의 생명은 위태롭게 되었다.

나사렛 예수가 스스로 자기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자백하였다는 소문이 신속히 퍼졌다. 갈릴리에서의 이와 같은 일반적인 감정의 흐름은 일 년 전의 유대 지방에서처럼 예수에 대한 반대로 돌아섰다. 이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극히 슬픈 일이었다. 그들은 저희에게 세속적인 권력을 주는 정복자를 원하였으므로 저희의 구주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썩을 양식은 원하였지만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은 원치 아니하였다.”(소망, 392-393)

“가장 극렬한 시험”을 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심

11. 그러나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간 것은 아니었다. 누가 남았으며, 그들은 왜 남았는가?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7-69)


예수께서는 자기를 떠나는 자들을 방해하려고 하지도 아니하시고 열두 제자를 돌아다보시고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씀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반문하여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하였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이스라엘의 교사들은 형식주의의 노예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항상 다투었다. 예수를 떠난다는 것은 율례와 규례를 고집하는 자들과 자신의 영화를 구하는 야심적인 사람들 가운데로 타락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후에 그들이 그 이전에 산 모든 생애에서보다 더욱 큰 평화와 기쁨을 발견하였다. 죄인들의 친구 되시는 예수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제자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사모하여 왔다. 이제 그가 오셨으니 그의 임재하심에서 떠나서 예수의 생명을 노리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저희를 박해한 자들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랑과 자비의 교훈을 떠나서 불신의 흑암과 사악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구주께서 당신의 놀라운 이적을 목도하였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실 때에 베드로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말을 함으로써 제자 된 믿음을 표시하였다. 영혼의 닻을 잃는다는 생각만 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 찼다. 구주를 잃는다는 것은 캄캄하고 폭풍우 치는 바다에 표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소망, 393)

12.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가 저들을 시험할 때,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분에게서 돌이켜 떠나갈 것을 아셨다. 그러나 이 흔들림의 위기는 누구를 위해 주어졌으며, 어떤 더 큰 시련의 때에 설 수 있도록 섭리로써 마련된 것이었는가?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28-32)


예수께서 당신의 많은 제자들이 돌아선 원인이 된 시험하는 진리를 제시하셨을 때에 그는 당신의 말씀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성취하실 자비의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시험이 올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 하나하나가 심한 시련을 당할 것을 미리 보셨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의 고뇌, 배신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등은 그들에게 가장 쓰라린 시련이 될 것이었다. 시험을 미리 주지 않으셨다면 단순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움직이던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다. 저희의 주님이 심판정에서 선고를 받을 때, 예수를 저들의 왕으로 환영하던 군중이 그를 향하여 노성을 발하고 욕설할 때, 조롱하는 군중이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외칠 때, 다시 말하면 저희의 세속적인 야심이 실망을 당하였을 때에 이 이기주의자들이 예수께 대한 저희의 충성을 포기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가장 크게 바라던 희망이 소멸됨으로써 슬퍼하고 실망한 제자들에게 가일층 쓰라리고 마음 괴롭히는 슬픔을 안겨 줄 것이었다. 그 어두운 시기에 예수에게서 돌아선 자들의 모본이 다른 사람들까지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친히 임재하심으로써 당신의 참된 제자들의 믿음을 여전히 북돋아 줄 수 있을 동안에 이 위기를 일으키셨던 것이다.

자기 앞에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다 아신 긍휼 많으신 구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길을 고르게 하셨고 저희로 가장 극렬한 시험에 대비하게 하셨으며 마지막 시험을 위하여 저들의 힘을 북돋아 주셨던 것이다.”(소망, 394)


[상고할 말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마 3:12)리라. 이 때는 깨끗하게 하는 시기들 중의 하나였다.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쭉정이는 알곡과 분리되고 있었다. 저들은 너무나 허영심이 많고 독선적이어서 견책을 받을 수가 없었고 겸비의 생애를 감수하기에는 너무나 세상을 사랑하였으므로 대부분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와 똑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이 제자들이 시험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시험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가 마음속에 들어올 때에 저희 생애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극기의 사업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가 발각될 때 그들은 성을 낸다. 그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투덜거리면서 예수를 떠난 것처럼 그들도 성을 내면서 떠나간다.”(소망,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