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갈릴리에서의 위기(1)

by 청지기 posted Nov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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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5시 15분


제9과


갈릴리에서의 위기(1)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383-388 ; 요한복음 6:22-47


기억절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서론 :  백성들이 자기를 왕이라 선언하는 것을 금하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애의 역사에 전환점이 이르렀다는 것을 아셨다. 오늘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기를 원하였던 군중들이 내일은 그에게서 돌아설 것이었다. 이기적인 야심이 실망을 당하게 될 때 그들의 사랑은 증오로, 찬송은 저주로 변할 것이었다. 이것을 아시면서도 예수께서는 위기를 피할 어떤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셨다. … 보리떡의 이적에서 가르치신 깊은 영적 교훈은 이해되지 못하였다. 이 교훈은 명백히 드러나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계시는 그것과 함께 더 심한 시험을 가져올 것이었다.”(소망, 383)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1. 보리떡 이적의 소식은 삽시간에 원근에 퍼졌다. 이튿날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어디에서 다시 그분을 만날 수 있었는가? 그들은 지난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자세히 들었으나 무엇을 원했는가?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요 6:22-25)


보리떡의 이적에 대한 소식은 원근에 퍼져서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예수를 보기 위하여 벳새다로 모여들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육로로 혹은 바다를 건너 찾아왔다. 전날 밤에 예수를 떠나갔던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서 예수를 뵙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돌아왔다. 왜냐하면 예수를 건너편으로 실어다 줄 수 있는 배가 거기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를 찾으면서 가버나움으로 돌아갔다.

… 잠시 후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가셨는데 벳새다에서 온 자들이 거기서 예수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제자들에게서 예수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셨는지를 들었다. 격노한 폭풍, 역풍을 거스려 여러 시간을 소용없이 노를 저었던 일, 물 위를 걸어오시던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하여 겁내던 일, 그의 안심시키는 말씀, 베드로의 모험과 그 결과, 태풍의 잠잠해짐과 배가 뭍에 닿던 일 등이 궁금히 여기는 군중들에게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주위에 모여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하여 이적에 대한 더욱 자상한 설명을 듣고자 하였다.”(소망, 383-384)

2. 예수님께서는 이적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대신에 그들의 이기적인 동기를 어떻게 폭로하셨으며, 어떻게 권면하셨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6-27)


예수께서는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심하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무슨 가치 있는 동기에서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떡을 얻어 먹고 배가 부르기 때문에 예수께 붙음으로써 현세의 이익을 좀더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분부하셨다. 단지 물질적인 유익만을 구하지 말라. 금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을 첫째의 노력으로 삼지 말고 영적 양식, 곧 영생하도록 있는 그 지혜 얻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것을 주실 수 있으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이기 때문이다.”(소망, 384-385)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3. 예수님의 권면을 듣고 일깨워진 청중들은 다시 어떻게 질문했으며, 그분께서는 영생의 길을 어떻게 소개하셨는가?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8-29)


잠간 동안 청중들의 관심이 일깨워 졌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하고 부르짖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많은 괴로운 일들을 실행하여 왔다. 그들은 더 큰 공로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율이 있다면 어느 것이든지 듣고자 하였다. 그들의 질문의 뜻은 곧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행할까요? 영생을 얻으려면 우리는 어떤 값을 치러야 합니까?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었다. 하늘의 값은 예수이다. 하늘에 들어가는 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요 1:29)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소망, 385)

4. 그러나 군중들은 왜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무엇에만 의존하고자 했는가?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 6:36)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하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행하시리라고 예언된 바 그 사업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이기적 야심으로 상상하던 만큼 메시야의 사업을 목격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들을 보리떡으로 단 한 번 먹이셨으나 모세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사십 년간이나 만나로 공급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메시야에게서 더욱 큰 축복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불만스러운 마음은 예수께서 저희가 목격하였던 바 그렇게 많은 이적을 행하실 수 있으신데도 어찌하여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건강과 힘과 재물을 주시고 그들을 억압하는 자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능력과 영예를 주어서 그들을 높이실 수가 없을까 하고 의심을 품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 주장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하신 사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예수께서 거절하신 것은 오해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자신이 자기 사명의 신성한 성격에 대해서 의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감히 역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저희 마음을 불신을 향해서 열었으며 사단이 심은 씨는 곡해와 배반 가운데서 그와 같은 종류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소망, 385)

만나 – 하늘로서 내려오는 참 떡의 한 표상

5. 유대인들은 조상들에게 만나를 주어 먹게 했던 모세는 공경하면서도 자신들에게 하늘의 떡을 직접 주어 먹게 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거절했는가?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같은 정신으로 그분을 대했는가?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0-33)


한 랍비는 조롱이 섞인 어조로 묻기를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하였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만나를 주신 자로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도구에 찬양을 돌리고 그 일을 성취하신 하나님은 잊어버렸다. 그들의 조상들은 모세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의 거룩한 사명을 의심하고 부인하였다. 그와 같은 정신으로 그 후손들은 하나님의 기별을 그들에게 전하신 분을 거절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만나를 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 히브리인들을 광야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내리는 떡으로 날마다 그들을 먹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그 양식은 하늘에서 오신 참 떡의 한 표상이었다. 참된 만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주는 성령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고 말씀하셨다.”(소망, 385-386)

6.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떡을 먹는다는 것의 영적인 의미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 표상의 실제를 어떻게 명백히 공개하고자 하셨는가?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4-35)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표상은 유대인들이 잘 아는 것이었다. 모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신 8:3; 렘 15:16)이라고 기록하였다. 랍비들도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영적 의미로 율법을 연구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으며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다 먹여 주실 것이라고 흔히 말하고 있었다.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보리떡의 이적 가운데 있는 깊은 영적 교훈을 명백히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회당에서 이 교훈을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공개하시려고 힘쓰셨다. 그들이 만일 성경을 이해했었더라면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뜻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바로 그 전날에 기진하고 피곤하였던 큰 무리는 예수께서 주신 떡을 먹었던 것이다. 저희가 그 떡을 먹음으로 육체적인 힘과 원기 회복을 얻은 것처럼 영생에 이르는 영적 힘을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소망, 386)

완고하고 편견으로 찬 심령들에게 거듭 호소하심

7.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능력의 산 증거들을 날마다 보면서도 왜 부인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완고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거듭 호소하셨는가?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6-37)


그들은 성령의 증거와 그들의 심령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산 증거가 날마다 그들 앞에 나타났건만 그들은 여전히 다른 표적을 요구하였다. 설혹 표적을 준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전과 다름 없이 여전히 믿지 아니할 것이었다. 그들이 이미 보고 들은 것을 통하여서도 확신하지 않는다면 더 기이한 이적을 보일지라도 그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불신은 언제든지 의심에 대한 변명을 찾을 것이며 가장 확실한 증거라도 논박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이 완고한 심령들에게 호소하셨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믿음으로 자기를 영접한 자는 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도 잃어버리는 바 될 수 없다. 장래의 생명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논쟁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죽음에서 오는 슬픔으로 더 이상 통곡할 필요가 없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소망, 386-387)

8. 그러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부모에 대한 편견을 일으킴으로 그분의 교훈과 신성의 증거를 묵살시키기 위해 어떻게 반문했는가? 그분께서는 왜 그들의 질문에 굳이 답하지 않으셨는가?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


그러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성이 나서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미천한 가문(家門)에 대하여 경멸조로 언급함으로써 편견을 일으키고자 애썼다. 그들은 예수를 갈릴리의 노동자요, 그의 가족은 빈한하고 천한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는 암시를 주었다. 그들은 이 불학무식한 목수의 주장은 거들떠 볼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 신비로운 탄생을 하셨다는 이유로 그들은 예수가 수상한 태생을 하였다고 암시함으로써 예수의 탄생에 있는 인간적 환경을 그의 경력 중의 한 오점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탄생의 오묘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바다를 건너시던 것에 관한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에 대한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의 생애의 특징을 이룬 이적에 주의를 환기시키지 아니하셨다. 그는 자원하여 자신의 명성을 거절하고 스스로 종의 모양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 말씀과 업적은 그의 품성을 드러냈다. 하늘빛에 마음을 연 자는 모두 그가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요 1:14)심을 깨달았다.”(소망, 387)

하나님께 배운 자들은 아들의 음성에 귀 기울임

9. 백성들의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의 편견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는가? 반면에, 하나님께 배운 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정[인식]할 것인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4-45)


바리새인들의 편견은 저희의 질문이 나타낸 것 이상으로 뿌리가 깊었다. 그 편견은 저희 마음의 강퍅함에 그 뿌리가 있었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그들의 마음속에 반항심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품고 있던 정신이 예수의 정신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버지의 이끄심에 응답하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심령들을 당신께로 이끄시고 계시는 바 그의 이끄심에 저항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께 나오기를 거절할 것이다.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사 54:13)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언급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성경 말씀을 자신들에게 전용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의 교사였다는 것은 그들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보이셨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배운 자들은 그 아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왔었으며, 그들은 나사렛의 예수에게서 자연과 계시를 통하여 아버지를 선포하신 그분을 인정할 것이었다.”(소망, 387-388)

10.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다시 생명을 되찾으신 것은 그분의 속성이 아버지의 속성과 동일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영생의 약속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버지의 품성과 같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졌나니”(요 6:46-47, 킹제임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이 말씀들을 들었던 사랑하는 요한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교회에게 이렇게 언명하셨다.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1, 12)다. 또 예수께서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육체가 되신 것은 우리가 그와 더불어 한 정신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무덤에서 나오게 되는 것은 이러한 결합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이는 단지 그리스도의 능력의 나타남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성령을 받아들일 때 곧 영생이 시작된다.”(소망, 388)


[상고할 말씀]

심령이 깨우침 받는 것은 논쟁이나 토론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쳐다보고 살아야 한다. 니고데모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갔다. 그는 성경을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였으니 곧 이론을 변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복종시켰을 때에 그는 하늘나라를 보기 시작하였다.”(소망, 175)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예수를 대적하는 관원들의 음모를 잘 아는 예수의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그에게 이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그들을 짓눌렀다. 그러나 사단은 곧 의심을 불어 넣었다. 메시야와 그의 임하심에 대한 그들 자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준비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나 얼마 후 그가 사라질 것이며 그가 두 번째 나타날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메시야는 인성과는 아무런 생래적(生來的) 관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메시야의 영광에 대한 일반 백성의 관념이 나사렛 예수에게는 들어맞지 않은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는 암시에 유의하게 되었다.”(소망, 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