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백부장

by 청지기 posted Sep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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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6시 36분


제12과


백부장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315-320; 마태복음 8:5-13; 누가복음 7:1-17


기억절 :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7-8)


서론 :  그리스도께서는 아들을 고쳐주신 신하에게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요 4:48)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민족이 당신께서 메시야가 되신 외적 표적을 요구하는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보시고 거듭거듭 놀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께 나온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셨다. 백부장은 구주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서 몸소 오셔서 이적을 행하시도록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고 말하였다.”(소망, 315)


유대인의 믿음과 대조되는 이방인의 믿음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1. 예수께서 산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누구를 만나셨으며, 그는 무엇을 간구했는가?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5-8)


백부장은 구주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서 몸소 오셔서 이적을 행하시도록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고 말하였다.

백부장의 하인은 중풍병으로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하인은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노예였으며 혹사와 잔학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에게 친절한 애정을 가졌으므로 그가 낫기를 심히 원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의 하인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구주를 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들은 소식은 그의 믿음을 북돋워 주었다. 유대인들이 형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인은 유대인들의 종교가 자신의 종교보다 우수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갈라놓은 국가적인 편견과 증오의 장벽을 이미 무너뜨렸다. 그는 하나님의 사업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대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에게 이미 보고된 바대로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서 그는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마음에 있던 영적인 모든 것이 구주의 말씀에 응답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 앞에 나아가기에는 무가치함을 느끼고 유대 장로들에게 자기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시도록 요청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그들은 크신 교사 되신 예수를 잘 알고 있으므로, 예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알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소망, 315-316)

2.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과는 대조적으로 당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증거로서 무엇을 요구하였는가?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막 8:11-12)


그리스도께서는 아들을 고쳐 주신 신하에게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요 4:48)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민족이 당신께서 메시야가 되신 외적 표적을 요구하는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보시고 거듭거듭 놀라셨다.”(소망, 315)

“…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3. 백부장은 예수님을 단지 치유의 이적을 행하시는 분으로만 믿지 아니하고, 어떤 분이시라는 것도 믿었는가? 사단이 그대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말할 때, 그대는 어떻게 주장해야 하는가?

백부장이 …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눅 7:6-7)


백부장을 그리스도에게 추천하였던 유대 지도자들은 저희가 얼마나 복음의 정신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요구할 수 있는 우리의 자격은 오로지 우리의 큰 필요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백부장이 ‘우리 민족’에게 보여 준 호의를 인하여 그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말하였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았으나, 도움을 요청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함에 의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큰 필요를 역설하였다.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참된 품성을 붙잡았다. 그는 예수를 단지 이적을 행하는 자로만 믿지 아니하고 인류의 친구요 구주로 믿었다.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 하셨’(딛 3:5)다. 사단이 그대는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랄 수 없다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사단에게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추천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나, 우리가 현재 그리고 항상 말할 수 있는 간구는 예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우리의 전혀 무력한 상태에 대한 간구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자기 의뢰심을 버림으로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손에는 가지고 갈 아무 대가도 없습니다.

          다만 주의 십자가에 매달릴 뿐이옵니다.’”(소망, 316-317)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주장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 사단은 말한다. ‘너는 죄인이다. 그리고 너는 더 이상 좋게 만들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구주가 필요하며, 모든 불법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뢰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예비된 샘에서 씻으며 죄악의 모든 결함에서 우리는 깨끗하게 된다.”(1설교, 247-248)

4. 백부장은 메시야의 혈통과 민족이요, 대대로 메시야에 관해 가르침을 받아왔던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는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9-12)

“…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 3:12)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메시야께서 하실 일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부조들과 선지자들의 영감을 받은 말과 제사 제도의 상징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무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에게서 흠모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방인 태생이요, 제국 로마의 우상 숭배 교육을 받았고,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그의 교육과 환경으로 말미암아 겉보기에는 영적 생애에서 끊긴 것처럼 보이고, 더구나 유대인의 완미함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로마인의 멸시로 말미암아 한층 더 방해를 받은 백부장인 이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그 진리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 자신이 그들의 메시야되심을 주장한 예수를 받아들이는지를 보고자 기다리지 않았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이 그를 비추었을 때에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식별하였다.”(소망, 317)

믿음의 본질인 말씀을 믿는 믿음 –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5.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셨다. 1888년의 기별자는 백부장이 보여준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는가?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8, 13)


백부장은 무엇이 그의 하인을 낫게 해 주기를 기대했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뿐이었다.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후에 백부장은 치유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의지했으며 무엇을 바라보았는가? 오직 말씀뿐이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 다른 어떤 방법으로 치료해 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었다.

그러므로 그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말씀을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며 그 말씀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오직 말씀만을 기대하고 의존하였다. 그리고 그 말씀은 원래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지금도 그 능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이것이 ‘너희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받고 그들 안에 거하도록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다. 위에서 살펴본 두 이야기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에 일이 성취되었다는 것에 유의하자.”(리뷰, 1896. 10. 27; A.T. 존스)

6. 1888년의 기별자는 이러한 실례들을 통해서 믿음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이방인 백부장이 보고 듣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에 대하여 어떻게 전혀 다른 믿음을 가르쳤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 11:52)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고 오직 그 말씀이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도록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고 오직 그 말씀이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기를 기대함으로 의롭게 되는 의를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에 의하여 얻는 의이다. 왜냐하면 칭의는 의롭다고 선언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의이다.”(리뷰, 1889. 1. 17; A.T. 존스)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었으며, 그 말씀을 맡은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그 책을 읽고 회당에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 나의 뜻을 이루며’라고 전파하였다.(사 55:11) 그 말씀을 읽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 말씀이 옳다. 그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 필요성을 보고 그것을 행할 것이다. 우리가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룰 것이다. 그런 후에 그들은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오랜 시간,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결코 이루지 못했다. 말씀을 행하는 그들의 행위는 사실은 너무 멀었으므로, 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도 이런 외침을 하게 되었다.

‘만일 한 사람만이라도 온 율법을 단 하루만이라도 지키고 한 조목에서라도 범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다, 만일 한 사람만이라도 완전한 안식일 준수에 영향을 끼치는 그 율법의 일점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때에 이스라엘의 고난은 끝날 것이고 드디어 메시야는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에서 말한 것을 행하려고 시작은 하였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

이것이 진화론이 항상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창조론과 정반대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제 이런 사람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바라본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한 유대인들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라난 한 로마인이 있었다. 그 백부장은 예수님이 계신 곳 주위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 말씀의 결과를 보고 드디어는 그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말씀한 것은 무엇이나 그러하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제 그 말씀의 혜택을 받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에게 가서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말하였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래 좋다 내가 가서 너의 하인을 치료해 주겠다고 대답하셨다. 오, 아니요 주여 당신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를 알기 위하여 이 일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리라.’ 이 말씀이 나갔을 때에 얼마나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이 나았는가? 20년이 지났는가? 아니다. 그가 완전히 낫기 전에 많은 기복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이제 정직하게 말해보자. 아니다. 결코 아니다. 말씀이 나갔을 때에 말씀은 그 말씀한 일을 이루었다. 말씀이 그 즉시 이루어졌다.”(리뷰, 1899년 2월 21, 28일, 3월 7일; A.T. 존스)

죽은 자도 살리는 말씀의 음성

7. 예수께서는 나인이란 성으로 여행하실 때, 그곳 성문에서 어떤 행렬을 만나셨는가? 그분께서는 그 행렬을 기쁨으로 돌이키실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과부의 슬픔에 대해 먼저 어떤 동정을 나타내셨는가?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1-13)


가버나움에서 팔십리 이상 떨어진 넓고 아름다운 에스드랠론 평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원(高原)에 나인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예수께서 이번에는 이곳으로 당신의 발걸음을 옮기셨다. …

그들이 가까이 갔을 때에 성문에서 장례의 행렬이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행렬은 느리고 슬픈 걸음으로 매장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선두에 운반되는 열린 관대 위에는 시체가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곡하는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들의 통곡하는 소리가 둘레에 가득 차 흘렀다. 모든 동네 사람들이 고인에 대한 경의와 유가족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모인 듯하였다.

그것은 동정을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고인은 어머니의 독자였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이 외로운 애도자는 그의 유일한 육신의 의지요 위안인 아들을 뒤좇아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과부가 예수의 계신 것을 알지 못하고 울면서 무턱대고 따라올 때에 예수께서 과부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셔서 부드럽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곧 과부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었지만, 이러한 자애로운 동정의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소망, 318)

8.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을 향하여는 어떤 말씀을 발하셨는가? 그분의 음성은 그에게 어떤 결과를 이루어주셨는가?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눅 7:14-16)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 시체를 만지시는 것도 예수를 부정하게 할 수 없었다. 관을 멘 자들이 조용히 섰고 애곡하는 자들의 통곡도 그쳤다. 그 두 무리들이 혹시나 하여 관 주위에 모여 섰다. 질병을 내쫓으시고 사귀를 정복하신 자께서 임석해 계셨다. 사망도 과연 예수의 권세에 복종할 것인가?

분명히 위엄 있는 음성으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말씀이 발하여졌다. 그 음성은 죽은 자의 귀를 울렸다. 청년은 눈을 떴다.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셨다. 아들의 시선이 자기 곁에서 울고 있던 어머니에게 머물렀다. 어머니와 아들은 얼싸안고 길고 기쁜 포옹을 하였다. 군중은 마치 넋을 잃은 것처럼 침묵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 하’였다. 입을 다문 채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있는 것처럼 잠시 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장례의 대열은 개선의 행렬로 나인성으로 돌아갔다. ‘예수께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소망, 318-319)

지금도 감소되지 않은 생명의 말씀, 그것이 곧 영생이다

9. 죽은 청년에게 말씀으로 생명을 주신 분, 그분의 생명의 말씀은 오늘날 그 효험이 감소되었는가? 청년에게 구주셨던 분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구주로서 어디에서 음성을 발하고 계시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나인 성문에서 슬퍼하는 어머니 곁에 서 계시던 예수께서는 관 곁에서 슬퍼하는 모든 애곡하는 자를 주목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슬픔에 동정을 느끼신다. 지난날에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던 예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신 온유하신 마음이다. 죽은 자를 부르사 다시 살리신 예수의 말씀은 나인성의 청년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이 오늘날에도 효험이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 능력은 세월의 추이로 말미암아 감소되거나 당신의 넘치는 은혜의 끊임없는 활동으로 인하여 고갈되지도 아니하였다.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는 여전히 살아 계신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과부에게 아들을 돌려주심으로 어머니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청년은 다만 이 지상에서의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일으킴을 받은 것으로, 그는 이생의 슬픔과 수고와 위험을 견뎌야 하며 다시 사망의 권세 아래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계 1:18; 히 2:14, 15)라는 무한하신 소망의 기별로 죽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슬픔을 안위하신다.”(소망, 319-320)

10. 그리스도께서 무덤으로 가는 청년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깨우셨던 것처럼, 재림의 날에는 어떤 말씀으로 믿음 안에서 잠들어 있는 자들의 귀에 영생을 명하실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서로 위로하라고 명하시는가?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엡 5:14)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하나님의 아들이 살라고 분부하실 때 사단은 죽은 자를 장악할 수 없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능력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영혼을 영적 사망에 붙잡아둘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죽은 모든 자들에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 말씀은 곧 영생이다. 인류의 시조에게 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과 같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인성의 청년에게 생명을 주었던 것과 같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하시는 그 말씀도 이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생명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골 1:13)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건짐을 받는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롬 8:11; 살전 4:16, 17).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 위로의 말씀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라고 명하신다.”(소망, 320)


[상고할 말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된 후에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믿음으로 사는 것, 곧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 외에는 정말로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만물은 다만 죽음뿐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물의 시작이요 생명이다. 왜냐하면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 곧 해와 달과 별과 동물과 인간들 모두가 존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의존되고 있다. 하나님이 오직 인간에게만 죽고 사는 문제를 선택하도록 하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이 선물은 믿음의 문을 연다. 사람이 유일한 생명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를 선택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의존하는 믿음이 그가 생명의 수단을 붙드는 방법이 된다. 이와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는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과학을 행사하기까지는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가질 수 없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에 순종할 수 없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저희는 …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리뷰, 1899년 3월 7일; A.T. 존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결과로 자연히 생긴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강요하여 믿도록 할 수 없다. 강제로 하여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기어 믿는다고 말할 수 있고 믿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 2:21) 그러므로 안식일은 완전한 믿음의 표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 -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의 표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율법의 일부로서 신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과 신뢰가 없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쉬는 날인 제 칠일까지도 외적으로 지키면서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바이블 에코 1896년 8월 17일; E.J. 와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