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유월절에 참여하심

by 청지기 posted Feb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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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6시 15분


제8과


유월절에 참여하심


[연구범위]

시대의 소망, 75-83; 누가복음 2:41-51 


기억절 :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9-50)


서론 :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묵상과 기도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머무르게 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맡은 직분의 신성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를 등한히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주를 잃었다. 그러나 그를 찾기 위하여 그들은 사흘 동안 근심하면서 찾으러 다녔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과 험담과 기도의 등한으로 말미암아 단 하루 동안에 구주에게서 떠나가게 되며 그를 찾아서 잃어버렸던 평안을 다시 회복하려면 여러 날을 슬퍼하면서 찾아야 할 것이다.”(소망, 83)


유월절

1.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연례적인 절기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세 절기는 무엇인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유월절은 어떤 절기인가?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레 23:5)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출 12:26-27)

출 12:1-14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세 연례적인 절기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주 앞에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세 절기 중 유월절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다.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었던 여러 나라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팔레스틴 각처로부터 경배자들이 많이 왔다.”(소망, 75)

“유월절을 지키는 일은 히브리 나라의 건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마지막 밤, 구원받을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박한 해방을 위해 준비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애굽에 최후의 형벌이 내리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동시에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가족들을 그들의 집에 모으도록 지시하셨다. 그들은 문설주에 살해된 어린양의 피를 뿌린 다음에 구운 어린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하였다. … 밤 자정에 애굽의 모든 장자는 다 죽임을 당하였다. … 그와 같이 하여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대대로 되풀이해서 말해질 것이었다.”(소망, 76-77)

2. 유월절과 함께 연결된 두 절기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가?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레 23:6)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레 23:11)

출 12:15-20


유월절을 뒤이어 7일간의 무교절이 있었다. 이 무교절의 둘째 날에는 그 해의 수확물 가운데 처음 익은 열매 즉 보릿단을 여호와 앞에 드렸다. 절기의 모든 의식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업을 표상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구속에 대한 실물 교훈이었고 유월절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 누룩 없는 떡, 처음 익은 곡식단은 다 구주를 상징하였다.”(소망, 77)

열두 살 되는 해

3. 모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요셉과 마리아도 매년마다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예수께서는 언제부터 이 대열에 참여하게 되셨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눅 2:41-42)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열두 살 되는 해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분기점(分岐點)이었다. 히브리의 남아들은 이 연령이 차면 율법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었다. 그 아이는 종교적 교훈을 받을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거룩한 절기와 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었다. 예수께서 어릴 때에 유월절에 참여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신 것도 이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모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요셉과 마리아도 매년마다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며 예수께서 적령(適齡)이 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를 함께 데리고 갔다.”(소망, 75)

4.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절기가 형식적인 준수였지만, 처음으로 유월절에 참여하신 소년 예수께서는 유월절 봉사의 의식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으셨는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8)


그리스도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절기의 준수는 형식주의로 전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그 절기가 얼마나 의미심장했던가!

소년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전을 바라보셨다. 그는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엄숙한 성전 봉사를 행하는 것을 보셨다. 향연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갈 때에 그는 다른 경배자들과 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셨다. 그는 그 감명적인 유월절 예식들을 목도하셨다. 그는 날마다 그 예식들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셨다. 의식의 모든 행사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새로운 충동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조용하고 열심히 어떤 큰 문제를 풀어내시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당신의 사명의 신비가 구주에게 공개되고 있었다.”(소망, 77-78)

랍비들과의 대화

5. 유월절 예식이 모두 끝나고 부모와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났으나 예수께서는 홀로 남기까지 무엇에 골몰해 계셨는가? 그분은 성전에 홀로 남으셨을 때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으셨는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눅 2:43)


이런 장면들을 명상하는 일에 골똘하여 그는 부모 곁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홀로 있기를 원하셨다. 유월절 예식이 끝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성전 뜰에 남아 계셨다. 그리하여 다른 참여자들이 떠나간 후에도 그는 뒤에 남으셨다.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 예수를 이스라엘의 훌륭한 교사들과 접촉하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엄밀히 순종하였으나 랍비의 의식과 관습은 따르지 않으셨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가 학식이 있는 랍비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요구 사항들에 더욱더 유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전 안에 계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는 받으신 것을 곧 남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하셨다.”(소망, 78)

6. 홀로 남아 성전과 연결된 거룩한 학교를 찾아가신 소년 예수께서는 랍비들 앞에서 자신의 어떤 태도로 주목을 이끄셨는가?

…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6-47)


그 당시에는 선지자 학교의 본을 따라 성전에 연결된 한 방은 거룩한 학교로 구별되었다. 여기에서 저명한 랍비들이 그들의 문하생들과 함께 모였는데 소년 예수께서 이 곳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 위엄 있는 학자들의 발 아래 앉아서 그들의 가르치는 교훈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으로서 이 선생들에게 메시야의 초림을 지적하는 예언의 말씀과 그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질문하셨다.”(소망, 78)

흑암 중에 빛이 비추임

7. . 예수께서는 랍비들과 대화하시면서 그들의 지혜가 편협하고 피상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우쳐 주셨는가? 박사들이 그분의 드러내신 진리의 체계에 유의했더라면 어떤 놀라운 결과가 예상되었는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7)


예수께서 하신 질문들은 오랫동안 가리워져 왔었으나 실상은 영혼의 구원에 극히 중대하고 심오한 진리들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모든 질문은 이 학자들의 지혜가 얼마나 편협하고 피상적인가를 드러낸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신령한 교훈을 주었고 진리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해 주었다. 랍비들은 메시야가 강림하시면 유대 나라는 놀랍게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제시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린양의 고난과 죽음을 예시하는 그 성경절들의 의미를 질문하셨다.

박사들은 예수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는데 그들은 그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린이의 겸손한 태도로 성경 말씀들을 암송하시면서 박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뜻을 드러내셨다. 그가 지적해 내신 진리의 체계들은, 만일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면 그 당시의 종교에 개혁을 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영적 사물에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소망, 78)

8. 예수께서는 어린 소년으로서 어떻게 지혜로운 방법으로 교만한 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나누어주셨는가? 랍비들은 저들의 무지를 깨닫고도 왜 인정하지는 않았는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예수의 말씀은 일찍이 사람의 말로는 움직여지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빛을 주시려고 하셨으며,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이 타인의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냉소하고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들은 듣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가르치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예수의 성경 지식을 시험하고 있다고 자위하였다. 예수의 소년다운 겸손과 미덕이 그들의 편견을 제거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무의식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열렸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셨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예언에 의해 지지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욕망을 부추겨 준 종전의 이론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가르친다고 하는 성경을 오해하였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는 질문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빛이 흑암 중에 비취고 있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요 1:5)였다.”(소망, 80)

하루에 잃은 예수를 사흘 만에 다시 찾음

9.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언제 깨닫게 되었는가? 그들은 왜 예수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불길한 예감으로 사로잡혔는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눅 2:43-44)


한편 요셉과 마리아는 큰 혼란과 걱정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예수를 잃어버리고 그가 뒤에 남아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당시 나라의 인구는 매우 조밀하였으며 갈릴리에서 온 무리의 대열은 매우 컸었다. 그들이 도시를 떠날 때에 큰 혼잡이 있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친구나 친지와 함께 여행하는 기쁨에 관심이 몰두되어 밤이 되기까지 예수가 없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쉬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에 도움이 되는 아이의 손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아이가 무리 가운데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비록 어렸지만 그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였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필요를 미리 알고 언제든지 와서 그들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염려가 되었다. 그들은 온 무리를 다 살펴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유아 시절에 헤롯이 그를 죽이려고 하던 것을 기억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들의 마음을 채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크게 자책했다.”(소망, 80)

10. 그분의 부모는 그분을 어디서 얼마 만에 찾았으며 그들은 예수의 대답을 통하여 무엇을 인식할 필요가 있었는가?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6, 49, 50)


부모에게 한 그의 질문에는 한 교훈이 있었다. 그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셔야 할 일에 종사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

예수의 부모가 그를 그들의 자식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는 날마다 저희와 같이 살고 그의 생애는 여러 가지 점으로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므로 그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그들에게 세상의 구주와 같이 살게 하신 축복을 감사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그와 헤어짐으로 그들이 괴로워한 일이나 그가 은근히 책망한 말은 그들에게 그들이 맡은 책임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처음으로 그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셨음을 나타내셨다. 예수의 탄생 전에 천사는 마리아에게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 33)고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마음속 깊이 두고 곰곰이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아이가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되실 줄은 믿으면서도 그의 사명에 대하여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요셉과는 친족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을 알았다.”(소망, 81-82)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

11. 예수께서는 왜 성전에 홀로 머무셨으며 왜 부모와만 집으로 돌아가는 특별한 여행을 하고자 결심하셨는가?

주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가 나사렛에 오셔서, 그들에게 순종하시더라. 그러나 주의 모친은 이 모든 말을 자기 마음 속에 간직하더라.”(눅 2:51, 킹제임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5-26)


성전에서 당신의 사명이 그에게 공개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무리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셨다. 그는 자기의 생애의 비밀을 아는 자들과 함께 조용히 예루살렘에서 돌아가기를 원하셨다. … 표상적 예식은 그것이 예배자들을 그들의 개인의 구주로서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할 때에만 효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고 명상하도록 이끌려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무리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갈 때에 여행에 대한 흥분과 사교적인 교제에 그들의 관심이 너무 몰두되어 그들이 목도하였던 그 예식은 잊혀졌다. 구주께서는 그러한 무리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와만 함께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고난을 당하시는 구주에 대한 예언으로 향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갈바리에서 겪을 당신의 어머니의 슬픔을 덜어 주시려고 힘쓰셨다. 지금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예수의 마지막 고통을 목도하게 될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기의 사명을 깨달아서 칼이 그녀의 마음을 찌를 때에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께서 그의 어머니와 헤어졌을 때에 어머니가 사흘 동안 그를 근심하면서 찾은 것처럼 그가 세상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실 때에도 어머니는 다시 사흘 동안 예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에 그의 슬픔은 다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마리아가 지금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 성경절을 깨달았다면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당할 고민을 얼마나 더욱 쉽게 견딜 수 있었을까!”(소망, 82-83)

12.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자들 가운데 그토록 낙담이 빈번히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묵상과 기도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머무르게 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맡은 직분의 신성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를 등한히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주를 잃었다. 그러나 그를 찾기 위하여 그들은 사흘 동안 근심하면서 찾으러 다녔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과 험담과 기도의 등한으로 말미암아 단 하루 동안에 구주에게서 떠나가게 되며 그를 찾아서 잃어버렸던 평안을 다시 회복하려면 여러 날을 슬퍼하면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 사귀는 가운데 예수를 잊어버리거나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림으로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너무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우리의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와 하늘 천사들과 분리된다. 이 거룩한 천사들은 구주의 임재하심을 원하지 않고 그의 부재(不在)를 허용하는 그런 곳에는 머무를 수 없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자들 가운데 그토록 낙담이 빈번히 존재하는 이유이다.”(소망, 83) 


[상고할 말씀]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생과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은 묵상과 경성(警醒)과 기도를 등한히 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잃어버리고 축복을 받기 전보다 더욱 심한 결핍 속에 빠져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혹하게 취급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과오가 자신에게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에게서 떠남으로 그들은 예수의 임재의 빛을 막아 버렸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리 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통회와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귈 때에 우리는 피차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가장 좋아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피차에 그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감화로 말미암아 부드럽게 될 것이다. 그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고후 3:18) 를 것이다.”(소망,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