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람

by 청지기 posted Dec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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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발람


[연구범위]

부조와 선지자, 438~452; 민수기 22~24장; 초기문집 266~269; 각 시대의 대쟁투, 529~530.


기억절 :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서론 :  여기에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의 엄숙한 경고가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특질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배양된 죄는 습관이 된다. 반복에 의하여 강화된 죄는 곧 지배적인 영향을 발휘하여 모든 다른 고상한 능력을 복종케 한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와 같은 서열에 두신 탐심의 죄를 그는 저항하지도 않았고 이기지도 못하였다. 사단은 이 한 결점을 통하여 그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품성을 망치고 기회주의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그의 주라고 불렀지만 하나님을 섬기지도,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지도 않았다.”(화잇주석, 민 22:15-17)

발락의 계획

1. 이스라엘은 바산을 정복한 후,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로서 어디에 진을 쳤는가? 그러자 모압인들은 침략자인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하여 미디안인들의 도움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무력에 호소하는 대신에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어떤 교묘한 계획을 세웠는가?

이스라엘 자손이 또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민 22:1)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많음을 인함이라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의 연고로 번민하여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3-6)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산을 정복한 후에 요단강으로 돌아와 즉각적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로서 여리고 평원의 맞은편 곧 사해(死海)로 들어가는 하구 곁에 진을 쳤다. 그들은 바로 모압의 변경에 있었으므로 모압인들은 침략자들이 가까이 접근한 것을 알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 무력에 호소하는 일은 히브리인을 위하여 싸우시는 초자연적 능력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러나 모압인들은 바로가 했던 것처럼 마술의 능력을 빌어 하나님의 사업을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내리고자 했다. … 모압 백성들은 국민성과 종교의 양면에 있어서 미디안인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모압 왕 발락은 같은 민족들의 공포심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대적하려는 그의 계획에 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기별을 보내어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음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 먹으리로다’(민 22:4)고 말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 발람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모압 땅에까지 퍼져 있었다. 모압 왕은 발람을 불러 그의 도움을 얻기로 결정하였다.”(부조, 438)

2. 이런 계획의 제안을 받은 발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많은 사람들은 발람처럼 어떤 유혹을 받게 되는가?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벧후 2:15)


일찍이 발람은 선량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배도하고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종이라고 공언하였다. …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벧후 2:15)였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신 탐욕의 죄는 발람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 한 가지 죄를 통하여 사단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멸망을 초래했다. 유혹자는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세속적 이득과 명예를 제시한다. 유혹자는 그들이 지나치게 양심적이므로 번영하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엄격한 성실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을 받는다. 한번의 그릇된 발걸음은 그 다음의 발걸음을 더욱 쉽게 만들고 더욱더 외람된 일을 행하게 한다. 탐욕의 지배를 받고 권세욕에 빠지게 될 때에는 가장 무서운 일들을 감행하게 될 것이다. 어떠한 세속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한동안 엄격한 성실을 떠났다가 그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들이 원할 때는 다시 그들의 행로를 변경할 수 있다고 스스로 아첨하는 자들이 많다. 이와 같은 자들은 스스로 사단의 올무에 빠지는 자들이며 그들은 좀처럼 그 곳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부조, 439-440)

탐욕의 유혹

3. 발람은 발락의 제안을 받았을 때, 단호하게 거절하는 대신 어떻게 대답했는가? 이에 하나님께서 분명한 기별을 주셨음에도 발락의 사신들에게는 여전히 어떤 여지를 남겼는가?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하니라”(민 22:8)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민 22:12-13)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자들이 그에게 온 용건을 말했을 때에 그는 발락의 보상을 거절하고 사신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람은 위험하게도 감히 유혹과 장난하려고 하였으며, 여호와의 권고를 듣기까지는 아무런 결정적인 대답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자들에게 그 밤을 자기와 함께 유하도록 간청하였다. 발람은 자기의 저주가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 계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한 이 지상이나 지옥의 어떠한 반대 세력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람의 교만심은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사신들의 말에 우쭐했다. 매우 값진 뇌물과 장래의 부귀영달은 그의 탐욕을 자극했다. 그는 그들의 내놓은 보물들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이고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을 엄격히 순종할 것을 공언하면서도 발락의 소원을 채워 주고자 하였다.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에게 내려와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을 자니라’는 기별을 전하였다.”(부조, 439)

4. 발람은 발락의 제안을 왜 거절했으며, 발락은 그에게 재차 어떤 보상을 제안했는가?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컨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민 22:15-17)


아침에 발람은 마지못해 사자들을 돌려보냈으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많은 이득과 명예에 대한 환상이 돌연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화가 난 발람은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부르짖었다.”(부조, 439)

“왕은 발람이 더 많은 보상을 얻기 위하여 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음보다 지위가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어 더 높은 지위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고 그들에게 발람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줄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였다. 선지자에게 보내는 발락의 긴급한 기별은 다음과 같았다. ‘청컨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민 22:16, 17).”(부조, 440)

짐승(나귀)의 경고

5. 발락에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도 계속 고집하는 발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오늘날 발람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 22:20)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발람은 두 번째 시험을 당했다. 발람은 사신들의 간청에 대하여 자신은 매우 양심적이며 성실하다고 공언하면서 아무리 많은 금과 은을 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동은 하지 못한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왕의 요구에 응하고 싶어했다. 하나님의 뜻이 이미 자기에게 분명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사자들에게 하나님께 다시 물어볼 터이니 하룻밤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마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처럼 설득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여호와께서 다시 밤에 발람에게 나타나사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 22:20)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어떻게든지 가려고 작정한 것을 보시고 당신의 뜻을 따르는 한 가도록 허락하셨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길을 선택한 후에 여호와의 재가를 얻으려고 애를 썼다.”(부조, 440)

“오늘날도 이와 같은 노선을 따라가는 자들이 무수히 많다. 그들의 의무가 그들의 기호와 일치했더라면 그것을 깨닫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무는 성경에 분명히 드러나 있거나 환경과 이성에 의하여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들이 그들의 욕망과 기호에 반대되는 까닭에 그들은 흔히 그것들을 제쳐 두고 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면상으로 그들은 크게 양심적인 것처럼 빛을 구하기 위하여 오래 열렬히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따르도록 허락하시고 그 결과를 당하게 하신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 … 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시 81:11, 12). 우리의 의무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행치 않을 핑계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 보겠다고 생각지 말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정신을 가지고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구할 것이다.”(부조, 440-441)

6.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고집으로 그들과 함께 동행하도록 허락은 하셨으나, 말 못하는 짐승을 통하여 어떻게 세 번이나 분명하게 경고하셨는가?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민 22:28)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시 81:11-12)

민 22:29~33 참조.


그 짐승은 발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다. 발람은 잔인하게 그 짐승을 때려 길로 되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담들로 막힌 협소한 곳에서 다시 천사가 나타나자 이를 본 그 짐승은 천사의 무서운 자태를 피하려고 주인의 발을 담벼락에 비비어 상처를 나게 했다. 발람은 눈이 어두워 그의 길을 하늘 천사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의 길을 막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발람은 대노하여 무자비하게 나귀를 때리고 억지로 전진하게 하였다. 

다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서 전과같이 무서운 자태로 천사가 나타났다. 가련한 짐승은 공포에 떨면서 꼼짝 못하고 섰다가 발람을 태운 채로 엎드려졌다. 발람은 말할 수 없이 분노하여 지팡이로 전보다 더 잔인하게 나귀를 때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나귀의 입을 여시고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게 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하셨다’(벧후 2:16). 나귀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라고 말했다.”(부조, 441-442)

이스라엘을 세 번 축복함

7. 발람이 발락에게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별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발락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왔음을 어떻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었는가?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민 23:7-8)

민 23:9~10 참조.


발람은 자기가 이스라엘을 저주할 목적으로 왔노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그의 마음의 감정과는 정반대되는 말이었다. 그의 영혼은 저주로 충만한 반면에 그는 축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발람이 눈을 들어 이스라엘의 진영을 바라볼 때에 그들의 번영의 증거를 보고 크게 놀랐다. 발람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미개하고 아무 조직도 없는 민족으로 무리를 지어 배회하면서 나라들을 해치므로 부근의 국민들에게 염오와 공포의 대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 모든 것과는 정반대였다. 발람은 이스라엘 진영이 그 규모가 크고 완전히 정렬되었으며 모든 것이 완전한 규율과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은총과 하나님의 선민으로의 그들의 특수한 성격을 보았다. 실로 이스라엘은 다른 국민들과 동일한 수준에 설 것이 아니요 만민 중에 탁월하게 될 것이었다.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로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발람이 이 말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주할 땅도 없었고 또 그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성격이나 그들의 풍속이나 습관을 잘 알지도 못했다. 그 후 그의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얼마나 현저하게 성취되었는가! 포로 생활을 하던 모든 세월 동안 각 나라로 흩어진 이후의 각 시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특유한 백성으로 존속하였다. 그와 같이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백성 곧 참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과객(過客)에 불과하고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부조, 444-447)

8. 발람은 세 번째의 제단 앞에서는 앞에서처럼 사술의 모양을 쓰지 않고 이스라엘을 어떻게 직접적으로 축복했는가?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민 24:1-2)

민 24:3~9 참조.


실망하고 고민에 싸인 모압 왕은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일루의 희망이 아직도 그의 마음에 머물러 있어서 그는 한 번 더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발락은 이제 그들의 신 바알을 음란하게 섬기는 사당이 있는 브올산으로 발람을 인도하였다. 여기서 전과 동일한 수효의 제단을 쌓고 같은 수의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발람은 다른 때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홀로 물러가지 않았다. 그는 사술을 부리는 체하지도 않고 제단 곁에 서서 널리 펼쳐진 이스라엘의 장막들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하나님의 성령이 발람에게 임하여 그의 입술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기별이 흘러나왔다.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 …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부조, 449)

위대한 예언과 발람의 최후

9. 발람은 발락을 떠나가기 직전,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위대한 예언을 선포했는가? 이 예언은 모세에게도 언제 계시로 주어졌는가?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발람은 자기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세계의 구주와 하나님을 대적한 원수들의 최후의 멸망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예언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발람은 최후로 모압과 에돔, 아말렉과 가인 족속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여 모압 왕에게 일루의 희망도 남기지 않았다.”(부조, 451)

“다시 허락의 땅의 변경에서 발람은 이 세상에 오실 구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당신의 아들을 타락한 인류의 구주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앞에 제시되었다.”(선지, 683-684)

10. 하나님의 기별, 즉 두 번의 명령(발락의 제안)과 세 번의 경고(나귀를 통해)와 세 번의 실패(축복 선포)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야망을 버리지 못한 발람은 결국 어떤 정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 발람은 스스로 발락에게 가서 어떤 제안을 했으며, 그 결과와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수 13:22)


부귀영달의 소망과 왕의 총애를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산 것을 알고 실망한 발람은 자기 스스로가 선택했던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다. 발람이 집에 도착한 후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제어하시는 능력이 그를 떠나고 이제까지 제지되어 온 그의 탐욕만이 그를 지배하였다.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발락이 약속한 보상을 얻고자 하였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번영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 달려 있고 그들을 죄에 빠뜨리지 않고는 그들을 전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모압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가 내리도록 하는 방법을 따르도록 조언함으로 발락의 환심을 사기로 결심하였다.

발람은 즉시 모압 땅으로 돌아가 왕 앞에 자기의 계획을 아뢰었다. 모압인들도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방패가 되실 것을 깨닫고 있었다. 발람이 제의한 계획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유인함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을 바알과 아스다롯의 음탕한 예배에 참석시킬 수 있다면 그들의 전능하신 보호자는 그들의 원수가 되실 것이며 그들은 곧 주위에 있는 맹렬한 호전 민족들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왕은 쾌히 이 계책을 받아들였으며, 발람 자신은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조력하였다. 

발람은 그의 악마적 계책이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가 당신의 백성에게 임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신 하나님의 공의는 유혹자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셨다. 발람은 이스라엘과 미디안 백성 사이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움을 예감한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부르짖었었다. 그러나 발람은 의인의 생애를 살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원수 편으로 결정되었다.

발람의 운명은 유다의 운명과 비슷하였고 그 두 사람의 성격에는 서로 유사점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려다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발람은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섬기노라고 공언하였다. 유다도 역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다고 공언하고 예수의 추종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부귀와 세속적 명예를 얻는 디딤돌로 삼으려 하였다. 여기에 실패하여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깨어지고 말았다. 유다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음으로 자기가 믿는 바와 같이 메시야가 이 세상에 세우려고 하는 나라에서 부귀와 영달을 얻으려고 기대하였다. 그가 바라던 일의 실패가 그를 배도와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발람과 유다 두 사람 다 큰 빛을 받았고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악이 온 성품을 중독시켜 그들을 멸망에 빠뜨렸다.”(부조, 451-452)


[상고할 말씀]

마음속에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특성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음속에 품은 한 작은 죄는 점점 품성을 저하시켜 그 고상한 모든 능력을 악한 욕망에 복종시킨다. 양심의 방벽 중 하나를 제거하고, 한가지 악습에 방종하는 것, 고상한 한가지 의무의 요구를 게을리하는 것은 영혼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사단이 들어와서 우리를 타락시킬 길을 열어준다. 가장 안전한 길은 다윗처럼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5)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다.”(부조, 452)

“죄로 인도하며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습관이나 행습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영혼에게 유익이 될 수 없다. 영원한 의의 원칙을 어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따를 수 없다. 그리고 한 가지 죄라도 마음에 품으면 그것은 품성을 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기에 넉넉하다. 몸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발이나 손을 절단하거나 심지어 눈을 빼버리는 일이 있거든 하물며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버리기 위하여는 얼마나 더 힘써야 할 것인가!”(소망, 439)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는 품성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에 넉넉하다.”(행적,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