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과   의(義)의 교사 (1)

by 청지기 posted Feb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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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시간: 오후 6시 29분



제9과


의(義)의 교사 (1)


[연구범위]

선지자와 왕, 244~249. 



기억절 :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눅 4:27)



서론 : “엘리사가 개혁 사업을 계속한 고로 많은 사람들이 이교에서 돌아와 참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배웠다. 선지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이적으로 기뻐하였고 마음이 정직한 모든 사람과 접촉하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어디 있든지 의의 교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선지, 259)

 

 

믿음의 실제


1.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존귀한 자이나, 어떤 질병을 갖고 있었는가? 문둥병은 무엇을 상징하는 질병인가? 모든 인류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보라.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왕하 5:1)

롬 3:10, 23.


 

동방에 알려진 모든 질병 중에 문둥병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그 불치성과 전염성, 그리고 그 병이 희생자에게 끼치는 끔찍스러운 결과 등은 가장 용기 있는 사람조차도 공포로 가득 차게 했다. 유대인들 간에 이 질병은 죄 때문에 받는 심판으로 여겨졌으므로 ‘하나님의 치심’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려졌다. 그 병은 뿌리를 깊이 박고 근절할 수가 없으며 치명적이어서 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의문의 법에 의하여 문둥병자는 부정하다고 선고되었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격리되었다. 무엇이든지 그가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였다.”(소망, 262)



2.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에게 왔을 때, 엘리사는 종을 보내어 그에게 어떤 기별을 전했는가? 나아만 장군은 왜 그처럼 쉬운 요구를 거절하고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했는가?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9~11)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섰다. 선지자는 사자를 통하여 나아만에게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고 명하였다. 나아만은 하늘로부터 어떤 놀라운 능력의 표시가 나타나기를 기대하였었다. 나아만은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고 하였다.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는 자존심이 몹시 상해서 울분과 절망 중에 이렇게 부르짖었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라.”(선지, 246-249)



믿음의 실제(계속)


3. 나아만에게 주어진 지시는 그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는 기별이었는가? 그는 지혜로운 종의 간청을 듣고 어떻게 했는가?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3, 14)


 

나아만의 종들은 나아만에게 엘리사의 지시를 따르도록 간청하였다. 그들은 탄원하기를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고 하였다. 나아만의 믿음은 시험을 당했고 그의 교만심은 그를 지배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믿음이 승리했다. 거만한 아람인은 그의 교만한 마음을 굴복시켜 여호와께서 보이신 뜻에 복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리하여 그의 믿음이 높임을 받아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돌아와서’, ‘내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고 고백하였다.”(선지, 249, 250)


 

4.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은 얼마나 고상한 믿음인가? 태초에 모든 만물이 무엇으로 창조되었는가? 태초에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3, 1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없었지만, 말씀하시니 ‘이루었다.’ 단지 말씀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했는가? 오직 말씀이 그것을 이룬 것이다.”(리뷰, 1898년 12월 27일, 에이 티 존스)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오전(誤傳)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품성과 운명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저들은 정신과 품성이 변화될 것이며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을 믿는 것은 곧 마음을 변화케 하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재현시킬 것이다.”(1기별, 346)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온 세상이 그 기만의 대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쟁투, 561)


편집자 주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 장군이 찾아왔을 때,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의아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 나라의 군대장관의 방문을 받고서도 그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기별만 전한 것은 예의에 벗어난 무례한 행동이었으며 결례(缺禮)를 범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엘리사의 행동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가르치고자 의도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리사는 의의 교사였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하여 종을 통해 기별만을 주었으며, 기별 외에는 어떤 친절이나 호의도 베풀지 않았다. 이것은 계시록 18장 천사(존스와 와그너)가 전한 기별, 즉 믿음은 오직 말씀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라는 기별과 일치된다. 존스는 증거하기를,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이다.”라고 했다. 그처럼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오직 말씀만을 주었고, 그는 오로지 말씀만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의 법칙을 배워야 하였다.



믿음의 실제(계속)


5. 예수님의 표적에서 믿음의 실제를 잘 설명하는 실례를 찾아보라. 예수님을 찾아와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던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연구해보라. 그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5~8)


 

“어느 날 어떤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6~1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알게 될 것이다. … 백부장이 나타낸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는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대답했다. … 그는 그의 하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직 무엇에만 의존했는가? ‘다만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리뷰, 1898년 12월 6일, 에이 티 존스)



6. 1888년 기별자들은 어떤 믿음을 특별히 강조했는가? 믿음은 바라는(소망하는) 것들의 실상임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 2)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하는 바를 스스로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그 말씀한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아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들어 있으므로 그 말씀에서 말씀하는 일의 실상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씀 자체가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리뷰, 1898년 1월 3일, 에이 티 존스)


“믿음은 말씀에서 말씀하는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다. 믿음이 곧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믿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진리에서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리뷰, 1899년 2월 21일, 에이 티 존스)



믿음의 실상


7. 나아만은 엘리사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오직 그의 전한 기별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어떤 축복을 받게 되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토의해보라.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하 5:9, 10)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4)


     

나아만의 믿음은 시험을 당했고 그의 교만심은 그를 지배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믿음이 승리했다. 거만한 아람인은 그의 교만한 마음을 굴복시켜 여호와께서 보이신 뜻에 복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리하여 그의 믿음이 높임을 받아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다.”(선지, 249)


“좋은 밭으로 표상된 청중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으로 받는 자들이다. 성경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는 자만이 참으로 배우는 자이다. 그는 그 말씀을 인해 떨게 될 것인데, 이는 그 말씀이 그에게 생생한 현실(現實)이 되기 때문이다.”(실물, 59)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선행(善行) 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과 생애가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유전과 후천적으로 이루어진 품성과 생활 습관 등과 충돌할 때가 있다. 그러나 … 그의 모든 습관과 관습과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킨다. … 그리고 그는 ‘인내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실물, 60)



8. 고침을 받은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예물을 받아주기를 강권하였으나, 엘리사는 어떻게 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어떤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인가?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왕하 5:15, 16)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들에게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음에 평화를 잃은 영혼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평화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며 그의 평화는 그의 믿음과 신뢰에 정비례할 것이다. 그는 그의 선한 행실을 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공로로 내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화잇주석, 눅 17:10)


“그대가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는 선물로 받아들일 때 그대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값없이 의로워진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것은 지각을 주신 하나님, 마음을 감동시키신 하나님,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도록 제일 먼저 마음을 끌어주신 하나님께 즐겨 헌신하고 봉사하도록 마음을 묶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동의이다. 믿음은 지적 능력을 하나님께 바치고 마음과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를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 삼는 것이다.”(믿음, 25)



값없는 선물


9.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기까지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한 선지자의 행동에서 우리는 어떤 고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 만약 나아만에게서 예물을 받았다면, 구원이 값없는 선물이라는 고귀한 진리는 어떻게 오해될 수 있었는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4, 5, 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만일 그대들이 빛의 광선에 대하여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마음속에 펼쳐지게 될 진리의 주제가 여기에 있다. 영생은 무한한 선물이다. 영생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일해서 얻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반드시 선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선물로서 믿음으로 얻어져야 하고, 그 결과로 감사와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 우리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우리에게 있는 어떤 공로 때문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믿음, 27)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귀한 생각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 마귀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자기의 힘이 무력하여질 것을 알므로 이 진리가 명백히 소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복음, 161)



10. 반대로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면서까지 나아만에게서 예물의 일부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고귀한 진리를 훼손시키는 행위인가?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은 얼마나 위험한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왕하 5:20)


 

피조물의 공로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일에나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어떤 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그 주제가 뚜렷하고 분명하게 밝혀주도록 하자. 믿음과 행함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살 수 있다면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하여 의무 아래 놓이게 된다. 여기서 거짓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기회가 주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하는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카톨릭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은 품삯처럼,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채무의 일부분이 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선한 행위 중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구원은 오로지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받은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완전히 값없는 선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믿음, 19) 


“피조물의 공로를 열렬하게 옹호하는 사람들 때문에 논쟁이 생기고 각 사람이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언제나 원칙과 품성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잘못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 그들은 영생의 삯을 얻기 위하여 피조물들의 공로가 전혀 쓸데없다는 것을 놀라움으로 식별할 수 있는 하늘의 안약이 필요하다.”(믿음, 23)



[상고할 말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비천한 생애, 자아 부정, 가난, 고난, 수치,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의 죽음을 당하도록 내어 주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제 충분하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이제 죽을 필요가 없다’ 라는 기쁨의 기별을 가져올 천사가 없었다. 천사의 무리들은 이삭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그분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중단시키기를 슬픈 마음으로 기다리며 희망하였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그와 같은 어떤 기별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심판정과 갈바리로 가는 길에서의 굴욕은 계속되었다. 그분은 조롱과 비웃음과 침뱉음을 당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머리를 떨구시고 운명하시기까지 그분은 그분을 미워하는 자들의 조소와 모욕과 욕설을 견디셨다.

   이와 같은 고난을 겪도록 그분의 아들을 주신 것보다 더 큰 사랑의 증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겠는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값없이 제공되었고 그분의 사랑은 무한한 것처럼 우리의 신뢰, 순종, 온 마음과 풍부한 애정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도 무한하다.”(3증언, 369)